이정록 15

그럴 때가 있다 / 이정록

매끄러운 길인데 핸들이 덜컹할 때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 눈물로 제 발등을 찍을 때다. 탁자에 놓인 소주잔이 저 혼자 떨릴 때가 있다. 총소리 잦아든 어딘가에서 오래도록 노을을 바라보던 젖은 눈망울이 어린 입술을 깨물며 가슴을 칠 때다. 그럴 때가 있다. 한숨 주머니를 터트리려고 가슴을 치다가, 가만 돌주먹을 내려놓는다. 어딘가에서 사나흘만에 젖을 빨다가 막 잠이 든 아기가 깨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촛불이 깜박, 까만 심지를 보여주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가 있다. 순간, 아득히 먼 곳에 불씨를 건네주고 온 거다. - 그럴 때가 있다 / 이정록 시인이 올해 교직에서 명퇴를 하고 '이발소'를 개업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웬 이발소? "라고 의아해했는데 '이야기발명연구소'의 줄임말이란다. 그리고 명..

시읽는기쁨 2022.09.08

서시 /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 서시 / 이정록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 하나의 몸만 성하면 다행이다, 행복하다, 라고 안도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뒷산의 나무까지 보듬을 줄 아는 이 갸륵한 심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시선을 확장해 보면 안다. 나의 안락은 타자의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내 몸의 성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살필 때 나는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시읽는기쁨 2022.08.31

선풍기 / 이정록

우리 집 선풍기는 열한 살 나랑 동갑내기, 땀 뻘뻘 일을 해도 "어이구 고물! 아이구 저 늙다리!" 구박받네 섧 고 서 러 워 도리질하던 선풍기 갑자기 고개를 끄덕끄덕 - 선풍기 / 이정록 선풍기 하나가 고장 나서 남은 선풍기가 거실과 안방을 들락거리느라 바빴다. 여름 시작하면서 청소한다고 선풍기를 뜯었다가 부주의로 날개를 조이는 플라스틱 캡이 부러졌다. 간단한 부품 하나가 없어 멀쩡한 선풍기가 방 한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혹시 길거리에 버려진 선풍기가 없나 열심히 살폈으나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 그대로였다. 옛날에는 골목마다 전파사가 있어서 무엇이든 간단히 수리할 수 있었다. 요사이는 대기업 제품이 아니면 고치기가 쉽지 않다. 고쳐서 쓴다는 인식도 자연스레 사라지고 있다. 글자가 이루는..

시읽는기쁨 2017.08.17

단추를 채우며 / 이정록

남자 옷은 오른쪽 옷섶에 단추가 달려 있다 여자 옷은 반대로 오른쪽 옷섶에 단춧구멍이 파여 있다 누구는 좌우뇌의 발달 차이 때문이라 했다 누구는 하인이 채워주기 쉽도록 귀부인의 단추가 옮겨갔다고 했다 모래밭에서 단추 찾듯 동서양 복식발달사를 뒤적였다 동서고금의 민화와 동굴벽화도 설펴보았다 뒤죽박죽이었다 칼 찬 병사와 말달리는 전사를 보고야 알았다 젖 물리는 여인네의 눈물 젖은 단추를 만나고야 무릎을 쳤다 남자는 왼 허리에 찬 긴 칼을 재빨리 뽑기 위해, 여자는 보채는 아이에게 젖 물리기 쉽도록 단추를 매단 것이었다 내 수컷이 단추처럼 작아졌다 내 단춧구멍은 죽임의 묘혈, 여자 것은 살림의 숨구멍이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단추, 너무 커서 테두리만 산마루에 걸쳤다 왼쪽 옷섶에 낮달이 떠 있다 아득히 멀지만,..

시읽는기쁨 2017.06.24

붉은 마침표 / 이정록

그래, 잘 견디고 있다 여기 동쪽 바닷가 해송들, 너 있는 서쪽으로 등뼈 굽었다 서해 소나무들도 이쪽으로 목 휘어 있을 거라, 소름 돋아 있을 거라, 믿는다 그쪽 노을빛 우듬지와 이쪽 소나무의 햇살 꼭지를 길게 이으면 하늘이 된다 그 하늘길로, 내 마음 뜨거운 덩어리가 되어 타고 넘는다 송진으로 봉한 맷돌편지는 석양만이 풀어 읽으리라 아느냐? 단 한 줄의 문장, 수평선의 붉은 떨림을 혈서는 언제나 마침표부터 찍는다는 것을 - 붉은 마침표 / 이정록 울산에 내려갔다 올라오는 길, 서쪽 낮은 산에 걸린 붉은 해를 마주보며 달렸다. 고속도로는 석양빛을 반사하며 붉게 빛났다. 마치 레드 카펫 위를 달리는 것 같았다. 석양 풍경은 언제나 비장하고 장중하다. 석양을 '붉은 마침표'로 본 시인의 시각이 새롭다. 태양..

시읽는기쁨 2017.05.29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 이정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산다 자주감자가 첫 꽃잎을 열고 처음으로 배추흰나비의 날갯소리를 들을 때처럼 어두운 뿌리에 눈물 같은 첫 감자알이 맺칠 때처럼 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눈물겹고 흐뭇하고 뿌듯하고 근사하고 짜릿하고 감격스럽고 황홀하고 벅차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운다 목마른 낙타가 낙타가시나무뿔로 제 혀와 입천장과 목구멍을 찔러서 자신에게 피를 바치듯 그러면서도 눈망울은 더 맑아져 사막의 모래알이 알알이 별처럼 닦이듯 눈망울에 길이 생겨나 발맘발맘, 눈에 밟히는 것들 때문에 섭섭하고 서글프고 얄밉고 답답하고 못마땅하고 어이없고 야속하고 처량하고 북받치고 원망스럽고 애끓고 두렵다 눈망울에 날개가 돋아나 망망 가슴, 구름에 젖는 것들 때문에 - 눈에 넣어도 ..

시읽는기쁨 2017.03.18

머리맡에 대하여 / 이정록

1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머리맡이 있지요 기저귀 놓였던 자리 이웃과 일가의 무릎이 다소곳 모여 축복의 말씀을 내려놓던 자리에서 머리맡은 떠나지 않아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던 첫사랑 때나 온갖 문장을 불러들이던 짝사랑 때에도 함께 밤을 새웠지요 새벽녘의 머리맡은 구겨진 편지가 그득했지요 혁명시집과 입영통지서가 놓이고 때로는 어머니가 놓고 간 자리끼가 목마르게 앉아 있던 곳 나에게로 오는 차가운 샘 줄기와 잉크병처럼 엎질러지던 모든 한숨이 머리맡을 에돌아 들고났지요 성년이 된다는 것은 머리맡이 어지러워지는 것 식은땀 흘리는 생의 빈칸마다 머리맡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나를 맞이했지요 때론 링거줄이 내려오고 2 지게질을 할 만하자 / 내 머리맡에서 온기를 거둬 가신 차가운 아버지 / 설암에 간경화로 원자력병원..

시읽는기쁨 2013.08.29

시인의 서랍

이정록 시인의 재미있는 산문집이다. 유년 시절의 추억을 중심으로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유머러스하면서 감명 깊게 그리고 있다.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가장 중심 되는 인물은 시인의 어머니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에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다. 시인이 시를 쓰는 소재도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얻는 것 같다. 시인이 들려주는 어린 시절 이야기는 곧 나의 얘기이기도 하다. 다른 아이보다 두 살 일찍 학교에 들어가 약자로 시달리면서 자란 이야기는 무척 공감된다. 또 현재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시인의 학교 현장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시인이 떠올리는 어릴 적 풍경에는 이런 게 있다. '잔치를 준비중인 할머니께서 두부를 만들고 난 뜨거운 국솥 찌꺼기를 가지고 부엌에서 나오신다. 외양간 구유도 돼지집 밥통도 이미 가..

읽고본느낌 2012.11.01

작명의 즐거움 / 이정록

콘돔을 대신할 우리말 공모에 애필(愛必)이 뽑혔지만 애필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중 한글의 우수성을 맘껏 뽐낸 것들을 모아놓고 보니 삼가 존경심마저 든다 똘이옷, 고추주머니, 거시기장화, 밤꽃봉투, 남성용고무장갑, 정관수술사촌, 올챙이그물, 정충검문소, 방망이투명망토, 물안새, 그거, 고래옷, 육봉두루마기, 성인용풍선, 똘똘이하이바, 동굴탐사복, 꼬치카바, 꿀방망이장갑, 정자지우개, 버섯덮개, 거시기골무, 여따찍싸, 버섯랩, 올챙이수용소, 쭈쭈바껍데기, 솟아난열정내가막는다, 가운뎃다리작업복, 즐싸, 고무자꾸, 무골장군수영복, 액가두리, 정자감옥, 응응응장화, 찍하고나온놈이대갈박고기절해 아, 시 쓰는 사람도 작명의 즐거움으로 견디는 바 나는 한없이 거시기가 위축되는 것이었다 ..

시읽는기쁨 2011.11.19

참 빨랐지 그 양반 / 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 자 물어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

시읽는기쁨 2011.08.04

지금 저 앞산 나뭇잎들이 반짝반짝 뒤집어지는 이유는 / 이정록

갓 깨어난 새들과 시소 놀이해봤냐고 어린 나뭇가지들이 우쭐거리기 때문이다 잠든 새들 깨우지 않으려 이 악문 채 새벽바람 맞아본 적 있냐고 젊은것들이 어깨를 으쓱거리기 때문이다 겨울잠 자는 것들과는 술래잡기하지 말라고 굴참나무들이 몇 개월째 구시렁거리기 때문이다 지금 저 앞산 나뭇잎들이 반짝반짝 뒤집어지는 이유는 애벌레들의 발가락 때문에 간지러워 죽겠는데 꽃까지 피었으니 벌 나비들의 긴 혀를 어쩌나 가을 되면 겨드랑이 찢어질 텐데 어쩌나 어쩌나 철부지들이 열매 걱정을 하기 때문이다, 그 허튼 한숨에 다람쥐며 청설모들이 입천장 내보이며 깔깔거리기 때문이다 딱따구리한테 열 번도 더 당하곤 목젖에 새알이 걸려 휘파람이 샌다고 틀니를 뺐다 꼈다 하는 늙다리 소나무 때문이다 딱따구리는 키스를 너무 좋아해, 나이테깨..

시읽는기쁨 2011.05.24

흰 별 / 이정록

볍씨 한 톨 매만지다가 앞니 내밀어 껍질을 벗긴다 쌀 한 톨에도, 오돌토돌 솟구쳐 오른 산줄기가 있고 까끄라기 쪽으로 흘러간 강물이 있다 쌀이라는 흰 별이 산맥과 계곡을 갖기 전 뜨물, 그 혼돈의 나날 무성했던 천둥 번개며 개구리 소리들 문득 내 머리 속에 논배미라는 은하수와 이삭별자리가 출렁인다 알 톡 찬 볍씨 하나가 밥이 되어 숟가락에 담길 때 별을 삼키는 것이다 밤하늘 별자리를 통째로 품는 것이다 - 흰 별 / 이정록 시인의 눈은 작은 쌀 한 톨에서 산줄기와 강물을 본다. 그리고 쌀 한 톨 속에 들어있는 천둥 번개, 개구리 소리 등을 읽어낸다. 쌀 한 톨을흰 별로 본 시인의 눈이재미있다. 가을 들녘은 밤하늘의 은하수로 환하다. 밥을 먹는 것은 거룩한 일이다. 온 우주를 통째로 내 안에 모시는 것이다..

시읽는기쁨 2007.10.10

더딘 사랑 /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 더딘 사랑 / 이정록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역시 다르다. 달의 차고 이지러지는 것을 윙크라고 보다니. 그렇다면 달의 윙크에 대한 지구의 대답은 무엇일까? 연모의 감정이 너무 뜨거워 화산으로 터져나오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조바심치고 수선스러운 것은 지구상의 작은 인간들밖에 없는 것 같다.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리는 더딘 사랑은 속전속결의 인간들 사랑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마치 우리가 하루살이의 바쁜 날개짓을 바라보듯이.

시읽는기쁨 2007.04.22

이웃 / 이정록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두부장수는 종을 흔들지 마시고 행상트럭은 앰프를 꺼주시기 바랍니다 크게 써서 학교 담장에 붙이는 소사아저씨 뒤통수에다가 담장 옆에 사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날린다 공일날 운동장 한번 빌려준 적 있어 삼백육십오일 스물네 시간 울어대는 학교 종 한번 꺼달란 적 있어 학교 옆에 사는 사람은 두부도 먹지 말란 거여 꽁치며 갈치며 비린 것 한번 맛볼라치면 버스 타고 장에까지 갔다오란 거여 차비는 학교에서 내줄 거여. 도대체 생명이 뭔지나 알고 분필 잡는 거여 호박넝쿨 몇개 얹었더니 애들 퇴학시키듯 다 잘라버린 것들이 말 못하는 담벼락 가슴팍에 못질까지 하는 거여 애들이 뭘 보고 배울 거여. 이웃이 뭔지 이따위로 가르쳐도 된다는 거여 - 이웃 / 이정록 교육문제에 대해 누구나 일가견..

시읽는기쁨 2007.02.20

줄탁 / 이정록

어미의 부리가 닿는 곳마다 별이 뜬다 한 번에 깨지는 알 껍질이 있겠는가 밤하늘엔 나를 꺼내려는 어미의 빗나간 부리질이 있다 반짝, 먼 나라의 별빛이 젖은 내 눈을 친다 - 줄탁 / 이정록 줄탁동기(줄啄同機)란 말이 있다. 줄(口+卒)이란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기 위해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말하고, 탁(啄)이란 알 속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어미닭이 밖에서 껍질을 쪼아 깨뜨려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줄탁동기란 스승이 제자의 노력이나 역량을 알아채리고 바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관계를 이르는 아름다운 말이다. 이 시는 별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특이해서 절로 경탄이 난다. 우주는 하나의 알이 되고, 나를 꺼내려는 어미의 부리질이 반짝하며 별빛으로 빛나고 있다. 언젠가 저 틈 너머 빛의 세계로 ..

시읽는기쁨 2006.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