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 9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있다.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나갈 한국 대표를 뽑는 본선이 어제 있었는데 81세의 최순화 씨가 베스트 드레스상을 받았다. 올 가을에 열리는 세계 대회에 나갈 대표가 되지는 못했지만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미스 유니버스에 도전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1943년생인 최순화 씨는 간병인으로 일하다가 어느 환자의 권유로 모델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의 나이 74세 때였다. 미스 유니버스에 출전하는 나이 제한이 없어지면서 최 씨의 목표는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 이번에 32명이 겨루는 본선까지 오르면서 주목을 받았으나 아쉽게도 한국 대표가 되지는 못했다. 만약 세계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면 지구촌의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특별한 ..

참살이의꿈 2024.10.01

7000

블로그의 글 수가 7,000개를 기록했다. 블로그를 처음 개설한 날이 2003년 9월 12일이니 어느새 20년 가까이 되었다. 날수로는 정확히 7,090일째다. 남에게는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천 단위의 소중한 기념일이다. 20년 전에 나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모든 것을 쏟아부은 밤골 생활이 여의치 못해서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세상은 등을 돌린 채 나를 외면했고, 진심을 터놓고 고민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 그때 절박한 심정으로 시작한 게 블로그였다. 온라인 공간에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나를 위로해 나갔다. 누구에게 드러내거나 보여주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글을 쓰면서 나를 더 알아가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블로그는 상상한 이상으로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 ..

길위의단상 2023.02.08

요즘은 나 홀로 / 이태수

요즘은 혼자만 있을 때가 잦아졌다 나 홀로 느긋하게 온갖 생각의 안팎을 떠돈다 거기에 날개를 달아보거나 내 속으로 깊이 가라앉을 때가 잦다 빈 집에서 빈 방 가득 생각들을 풀어내다 거둬들이다 하면서 나 홀로 술잔을 기울일 때가 좋아졌다 혼자 마신 술에 젖어 술이 나를 열어주는 길을 따라 나 홀로 유유자적 거닐 때가 좋다 적막이 적막을 껴입고 또 껴입으면 혼자 그 적막을 지그시 눌러 앉히곤 한다 눌러 앉혀 다독이면 그윽하게 따뜻해지는 적막이 좋다 나 홀로, 늘 혼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 요즘은 나 홀로 / 이태수 대상포진 걸린 지가 세 주가 지났다. 그런데도 아직 포진이 생긴 얼굴은 전류가 흐르는 듯 지릿지릿하다. 마치 폭격을 당한 느낌이라 '포진'의 '포(疱)'가 나에게는 '포(砲)'로 읽힌다. 근 한 ..

시읽는기쁨 2021.05.11

필요한 하나

조선 중종 때 문신인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의 호는 팔여거사(八餘居士)다.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기묘사화에 휩쓸려 삭탈관직 되자 고양 명봉산 자락에 들어가 은거하며 사신 분이다. 그가 말한 '팔여(八餘)', 즉 '여덟 가지 넉넉한 것'은 이렇다. 1. 토란국과 보리밥을 넉넉히 먹고 2. 등 따뜻하게 넉넉히 잠자고 3. 맑은 샘물을 넉넉히 마시고 4. 서가에 가득한 책을 넉넉히 읽고 5. 봄꽃과 가을 달빛을 넉넉히 감상하고 6. 새와 솔바람 소리를 넉넉히 듣고 7. 눈 속에 핀 매화와 서리 맞은 국화 향기를 넉넉히 맡는다. 8. 그리고 이 일곱 가지를 넉넉히 즐기니, 이것이 팔여(八餘)다. 팔여거사의 넉넉함은 자족(自足)에서 나온다. 사람은 욕심을 부리면 끝이 없지만, 분수를 알고 만족하면..

참살이의꿈 2020.12.14

임류의 자족

따뜻한 봄날에 백살이 다 된 임류라는 노인이 겨울에 입던 갖옷을 그대로 걸치고, 지난 가을에 떨어진 이삭을 밭이랑에서 주우며 노래를 부르다 걸어가다 하였다. 이것을 위나라로 가다가 벌판을 바라보던 공자가 보고는 뒤따라 오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노인은 말을 걸어 볼 만한 사람인 것 같다. 누가 가서 말을 해 보겠느냐?" 말 잘 하는 자공이 자청하여 밭 언덕을 가로질러 노인에게 가서 측은하다는 듯 말을 걸었다. "이렇게 이삭을 주우며 노래를 부르시는데, 선생께서는 스스로의 삶에 대해 전혀 후회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그러나 임류는 들은 척도 않고 발걸음을 옮기며 노래를 불렀다. 자공 또한 노인이 말을 할 때까지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노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말하였다 "내게 후회..

참살이의꿈 2013.04.29

장자[197]

열자 선생은 궁색하여 용모에 굶주린 기색이 역력했다. 객이 이에 대해 정나라 재상 자양에게 간언을 했다. "열자는 모두가 도를 지닌 선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군자의 나라에서 살면서 궁색하니 군자께서 도움을 주시지 않는다면 선비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자양은 이 말을 들은 즉시 관리에게 명하여 그에게 곡식을 보내주었다. 열자 선생은 사자를 접견하고 재배한 후 곡식을 사절했다. 사자가 떠나고 열자가 방에 들어오자 그의 처가 가슴을 치며 말했다. "첩이 듣기로는 도인의 처자는 다 편안하게 산답니다. 지금 우리는 굶주리는 처지에 마침 군주께서 과분하게도 선생에게 양식을 보내셨는데 선생은 이를 받지 않으시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열자 선생은 웃으면서 처에게 일러 말했다. "군주는 ..

삶의나침반 2012.03.05

과잉과 결핍

과잉과 결핍은 동의어다. 과잉 속에 결핍이 들어 있고, 결핍 속에 과잉이 들어 있다. 지금과 같은 욕망 과잉의 시대에 사람들 가슴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다. 많은 것을 갖고 있어도 공허하고 불안하다. 결핍은 결코 과잉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결핍의 치료제는 결핍이다. 과욕(過慾)이 아니라 과욕(寡慾)이다. 작아져야 커지는 것은 역설의 진리다. 밖으로 목표를 줄이고 안으로 욕망의 바람을 잠재우자. 허실생백(虛室生白), 마음이 비고 고요해야 행복이 찾아온다. 욕망과 목표를 낮추자. 어느 정도의 선에서 멈출 줄 알고 자족(自足)을 배우자. 더 많은 것을 욕심내며 초조해 하는 한 평화는 없다. 과잉과 결핍 사이의 조화,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거기에 중도(中道)의 묘(妙)가 있다.

참살이의꿈 2011.05.31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 이현주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바람으로 피었다가 바람으로 지리라 누가 일부러 다가와 허리 굽혀 향기를 맡아준다면 고맙고 황혼의 어두운 산그늘만이 찾아오는 유일한 손님이어도 또한 고맙다 홀로 있으면 향기는 더욱 맵고 외로움으로 꽃잎은 더욱 곱다 하늘 아래 있어 새벽이슬 받고 땅의 심장에 뿌리박아 숨을 쉬니 다시 더 무엇을 기다리랴 있는 것 가지고 남김없이 꽃 피우고 불어가는 바람 편에 말을 전하리라 빈들에 꽃이 피는 것은 보아 주는 이 없어도 넉넉하게 피는 것은 한 평생 홀로 견딘 그 아픔의 비밀로 미련 없는 까만 씨앗 하나 남기려 함이라고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끝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지리라 -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 이현주 내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시읽는기쁨 2008.06.23

창 밖에 살구꽃이 환하다

텃밭을 일부 정리하고 감자를 한 줄 놓았습니다. 지난주에 고향에 갔을 때 어머니로부터 알이 작은 씨감자를 받았는데 눈을 따지 않고 그냥 심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흙을 만지니 감회가 새롭고 기분도 무척 좋았습니다. 무겁던 몸과 마음이 새 기운으로 충전되는 것 같았습니다. 피곤하지만 뭔가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올해는 작은 묘목 몇 그루만 심었습니다. 앵두나무,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자귀나무. 여기는 이제야 산수유, 살구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벚꽃은 작은 봉오리가 겨우 보입니다. 그만큼 이 동네는 춥습니다. 제가 심었던 나무에서 파릇파릇 새싹이 나오는 모습을 보는 것은 행복합니다. 별로 거두지도 못했는데 나무들은 스스로 자리를 잡고 적응하며 커갑니다. 불평 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참살이의꿈 2006.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