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12

가을의 시 / 장석주

가을이 오면 어제 굶은 자를 하루 더 굶게 하고 오래된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고 슬픈 자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주소서. 부자에게선 재물을 빼앗고 학자에게는 치매를 내리소서. 재물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소서. 육상선수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려 혹사당한 뼈와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수도자들과 사제들에게는 금욕의 덧없음을 알게 하소서. 전쟁을 계획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해서 도처에 분쟁과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게 하소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써온 자들은 서정시의 역겨움을 깨닫게 해서 이제 그만 붓을 꺾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집을 찍느라 열대우림이 사라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고요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는 저 무수한 멸망과 죽음들이 이 ..

시읽는기쁨 2023.11.14

나를 살리는 글쓰기

시인, 비평가, 에세이스트, 문장 노동자, 독서광 - 이 책의 저자인 장석주 작가가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다. 작가는 40년 동안 쉼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100권에 가까운 저서를 낼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다. 작가는 말한다. "글쓰기는 피와 종이의 전쟁이다." 는 글쓰기에 임하는 작가의 치열한 정신을 보여준다. 글쓰기는 유희가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투신하는 행위다. 전업작가의 글쓰기는 종교인의 처절한 수행과 닮았다. 그러므로 자기 발견이면서 자기 치유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난 글쓰기의 엄중함과 치열함이 잘 드러나 있다. 아무나 작가가 되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도서관에 묻혀 살며 읽고 글쓰는 일에 몰두했다. 이런 과정이 '..

읽고본느낌 2023.10.23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장석주 작가의 글은 가을과 잘 어울린다. 그중에서도 늦가을 저녁의 분위기가 진하다. 쓸쓸하지만 석양의 기운이 따스하다. 이 계절에 읽기에 적당하다. 작가의 산문집인 에는 그런 느낌의 글이 가득하다. 음미하며 조금씩 읽었다. 책에 실린 글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일요일의 문장'에 연재한 것이다. 책 표지에서 작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시인. 산책자 겸 문장노동자. 서재와 정원 그리고 책과 도서관을 좋아하며 햇빛과 의자를, 대숲과 바람을, 고전과 음악을, 침묵과 고요를 사랑한다." 작가의 글에는 안성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지금도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작가는 안성에서 홀로 살아가며 대추알처럼 잘 익어가지 않았나 싶다. 모든 것을 앗아가고 부서뜨리는 시간의 덧없음을 바라보며 작가는 ..

읽고본느낌 2023.10.13

좌파와 우파

경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정치적 이념의 양극화도 덩달아 심각해지는 것 같다. 전에는 진보와 보수로 두리뭉실하게 나누었지만, 그중 상당수가 극단으로 쏠려서 '좌빨'이나 '수꼴'이라는 네이밍이 이젠 자연스럽게 들린다. 동기들 단톡방은 이런 극단적 목소리로 차고 넘친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를 구분하는 경계는 모호하다. 예를 들면, 현재 민주당이 진보 정당인가? 나는 국민의힘과 별로 다르지 않은 보수 정당이라고 판단한다. 지난 선거에서 내건 공약을 보면 두 당의 차이가 거의 없다. 민주당이 개혁 보수라면, 국민의힘은 수구 보수다. 둘 다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당이다. 진정한 진보라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민주당을 어떤 사람은 좌파 정당이라고까지 부른다. 좌파에 진보가 ..

길위의단상 2022.09.05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안성에서 전원생활을 하는 장석주 작가의 행복론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 소박한 삶을 살자는 흐름은 오래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화려한 소비 중심의 현대 문명에 대한 반감이자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려는 자연스러운 운동이다. 작고 단순함에서 기쁨과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문명이 주는 안락에서 적당한 거리를 두며 불편하더라고 적게 소비하고 단순하게 살아가는 데서 행복을 찾는다. "소박하게 먹고 단순하게 사는 것, 그게 내 방식의 삶이다. 하루의 보람은 사과 한 알 먹는 거, 세 시간 이상 햇볕을 쬐며 걷는 거, 8시간 정도 읽고 쓰는 거, 심심함 속에 머무는 거 따위다. 그리고 이타적 생각을 하며 살기,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 되기를 실천해야 삶이 온전해진다." 작가는 시골에 살며 그런 삶을 실천한..

읽고본느낌 2018.05.16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모란과 작약 꽃대를 보듯 책을 보며 살았다." 책머리의 첫 문장이다. 이 책은 장석주 작가의 독서록이다. 작가는 엄청난 다독가다. 표지에는 '문장노동자며 날마다 읽고 쓰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작가에게 책 읽기는 구도 과정과 닮았다. "책 읽기는 내 존재를 지탱하는 광합성작용이며 책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책을 읽기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는 말 속에 독서에 대한 작가의 믿음이 들어 있다. 독서광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다. 하루에 적어도 한 권 넘게 독파해야 자격이 있을 것이다. 작가는 시골에 내려가서 종일 책과 함께 살고 있다. 일 년에 천 권 정도의 책을 보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잊기 위해 책의 세계에 파묻혔다. 매일 한 권씩 읽으며 감상을 적고 그 결과를 일 년 뒤에 ..

읽고본느낌 2015.03.31

봄비 여름비 가을비 겨울비

토요 휴일에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셋이서 가까운 산길을 걷기로 했는데 비 때문에 취소되었다. 꽉 차게 되어 있는 하루가 갑자기 텅 비어 버렸다. 비 오는 날의 적적함은 견디기 힘들다.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을 잠재우려 장석주 시인의 산문집을 꺼내본다. 마침 비에관한 글이 나온다. 봄비 봄비는 겨우내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을 두드리며 온다. 비들은 오, 저 ‘시체들의 창고’인 땅을 맹인의 지팡이로 두드리듯 두드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얼어붙은 땅은 풀리고 땅 속에 숨은 씨앗들은 싹을 땅거죽 밖으로 밀어낸다. 봄비가 충분히 내리고 난 뒤에야 작약의 붉은 움이 돋고 모란의 묵은 가지들에도 꽃눈이 돋는다. 들창 너머로 혼자 내다보는 봄비는 쓸쓸하다. 곡식이 있으면 밥을 끓이고 곡식이 끊기면 굶는다. 하루도 거르..

읽고본느낌 2010.06.12

추억

서점에 들렀다가 장석주의 을 샀다. 글을 읽으며 역시 장석주라는 찬탄이 절로 나왔다. 장석주의 글은 깊으면서도 진솔하다. 글이나 작가도 개인적 취향에 따라 호오가 달라지겠지만 나에게는 장석주의 글이 좋다. 작가가 일으킨 파문이 전해져 공명을 일으키면서 내 마음 깊은 데를 두드린다. ‘어느 날 우유를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다가 알 수 없는 공허감 때문에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이런 평범한 문장도 오늘 같은 날은 나를 울린다. 은 부제가 ‘장석주의 장자 읽기’다. 본인의 삶과 장자가 ‘느림과 비움’을 주제로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다. 책 내용 중에서 추억에 대해 쓴 부분이 있다. 장석주가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는데 직접 옮긴다. ----------------------..

읽고본느낌 2010.05.11

명자나무 / 장석주

불행을 질투할 권리를 네게 준 적 없으니 불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마라!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 것. 허리를 곧추세울 것. 헤프게 울지 말 것. 울음으로 타인의 동정을 구하지 말 것. 꼭 울어야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깨비 앞에서 울 것. 외양간이나 마른 우물로 휘몰려가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울 것. 비겁하게 피하지 말 것. 저녁마다 술집들을 순례하지 말 것. 모자를 쓰지 말 것. 콧수염을 기르지 말 것. 딱딱한 씨앗이나 마를 과일을 천천히 씹을 것. 다만 쐐기풀을 견디듯 외로움을 혼자 견딜 것. 쓸쓸히 걷는 습관을 가진 자들은 안다. 불행은 장엄 열반이다. 너도 우니? 울어라, 울음이 견딤의 한 형식이라는 것을, 달의 뒤편에서 명자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마라. - 명자나무 / 장석주 나를 찾아오는 ..

시읽는기쁨 2008.03.13

대추 한 알 /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 대추 한 알 / 장석주 대추 한 알 속에 해가 들어있다. 달이 들어있다. 바람도 들어있고, 물도 들어있다. 그리고 내 할아버지도 들어있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할아버지는 대추 한 웅큼을 장손자에게 집어 주셨다. 달콤한 대추를 먹으며 그때는 몰랐다. 그 속에 먼 조상들까지 숨어있는 줄 그때는 몰랐다. 저기 흰 수염으로 앉아 있는 사람, 저 사람 속에도 땡볕이 들어있고,천둥소리 들어있다. 수많은 희열과 고통이 어우러져 저 사람을 만들고 있다. 태풍을 만나고, 사막을 건너고, 힘든 고난의 길 뒤에 부드러..

시읽는기쁨 2007.04.19

비주류는 내 본능이다

서점에서 아이쇼핑을 즐깁니다. 온갖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서로 자기를 봐달라고 예쁘게 치장을 하고 줄지어 앉아있습니다. 우선은 책의 제목에 따라 조심스레 손길이 끌려집니다. 대개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만 어떨 때는 숨어있는 보물을 발견하듯 기분이 좋아질 때도 있습니다. 장석주 시인이 쓴 '비주류 본능'이라는 산문집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순전히 제목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 제목에 이끌리게 된 것은 나에게도 비주류 본능이 숨어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삶과 생각을 보면 나도 아웃사이더 쪽으로 기울어지는 편입니다.나는 내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비주류 본능을 느낍니다. 20대 때 '아웃사이더'라는 책을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콜린 윌슨이라는 저자의 이름도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혹..

읽고본느낌 2007.02.22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

땅거미 내릴 무렵 광대한 저수지 건너편 외딴 함석 지붕 집 굴뚝에서 빠져나온 연기가 흩어진다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오, 저것이야! 아직 내가 살아 보지 못한 느림! -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 빨리 빨리가 미덕이 되었고, 분주함은 일상이 되었다. 어떤 때는 나 자신이 현대 문명의 속도전에 이유도 모른채 내몰린 힘없는 병사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쁜 일상의 틈 사이로 언뜻 비치는 그런 느낌...... 저녁 어스름, 고향의 초가 지붕 위로 느릿느릿 피어오르던 연기를 떠올리면 나는 슬프다. 바삐 달려오기만 한 내 이 자리는 어디인가?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다.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시읽는기쁨 2004.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