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 12

오래된 농담 /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 평 받으려고 언덕길을 오르던 늙은 아내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그늘보다 몇 평이나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깊어 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길을 오르던 늙은 남편이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열매보다 몇 알이나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머리는 비었지 허파엔 바람 들어갔지 양심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

시읽는기쁨 2017.12.11

왜요? / 천양희

강변역이 강변에 있지 않고 학여울역에 여울이 없다니요? 물까마귀는 까마귀가 아니고 물새라니요? 섬개개비는 산새이면서 섬에서 살다니요? 송사리는 웅덩이에서 일생을 마치고 무소새는 평생 제 집이 없다니요? 질경이는 뿌리로 견디고 가마우지는 절벽에서 견디다니요? 푸른 소나무도 낙엽지고 더러운 늪에서도 꽃이 피다니요? 인생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라니요? 필연적인 것만이 무겁고 무게가 있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니요? 사자별자리, 오늘밤 하늘에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회신 바랍니다, 이만 총총 - 왜요? / 천양희 저녁 무렵 밖에 나가면 머리 위에는 사자자리가 떠 있다. 서쪽으로는 오리온이 진다. 사자자리는 봄의 별자리다. 사자자리를 보고 하늘에도 봄이 온 걸 확인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

시읽는기쁨 2016.05.01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폭포 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수궁水宮을 폭포 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 바위들이 몰래 흔들린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시인의 대표작인 '직소포에 들다'를 시인이 직접 하는 말소리로 듣는다. 산문집 에 실린 글로, 제목은..

시읽는기쁨 2015.11.24

일흔 살의 인터뷰 / 천양희

나는 오늘 늦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세월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고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당신이 무엇이 되고 싶었느냐고 입술에 바다를 물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내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노을이며 파도며 다른 무엇인가 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늘 실패했거든요 정열의 상실은 주름살을 늘리고 서쪽은 노을로 물들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았냐고 해송을 붙들고 그가 물었을 때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내일에 속는 것보다 세월에 속는 것이 나았거든요 꽃을 보고 슬픔을 극복하겠다고 기울어지는 해를 붙잡았습니다 당신은 어느 때 우느냐고 파도를 밀치며 그가 물었을 때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했을 때 운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보일까 말까 한 작은 간이역이 행복이었거든요 일흔 살의 인터뷰를 마..

시읽는기쁨 2015.07.23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한 갑자가 돌아가도록 살아보니 세상일 내 뜻대로 되는 게 별로 없다는 걸 알겠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는 젊은 시절의 호기였을 뿐이었다. 긍정보다는 체념의 철학이 세상살이에는 더 어울린다. 단추 하나 채우거나 옷 한 벌 입기도 힘든데 인생살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잘못 채운 단..

시읽는기쁨 2014.04.04

다행이라는 말 / 천양희

환승역 계단에서 그녀를 보았다 팔다리가 뒤틀려 온전한 곳이 한군데도 없어 보이는 그녀와 등에 업힌 아기 그 앞을 지날 때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돈을 건넨 적도 없다 나의 섣부른 동정에 내가 머뭇거려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그래서 더 그녀와 아기가 맘에 걸렸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는데 어느 늦은 밤 그곳을 지나다 또 그녀를 보았다 놀라운 일이 눈 앞에 펼쳐졌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바닥에서 먼지를 툭툭 털며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자, 집에 가자 등에 업힌 아기에게 백년을 참다 터진 말처럼 입을 열었다 가슴에 얹혀 있던 돌덩이 하나가 쿵, 내려앉았다 놀라워라! 배신감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멀쩡한 그녀에..

시읽는기쁨 2011.03.04

물에게 길을 묻다 / 천양희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 하고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울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흘끗 보았지요 어둠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

시읽는기쁨 2009.06.10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 천양희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어떤 날은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막무가내 올라간다 고비를 지나 비탈을 지나 상상봉에 다다르면 생각마다 다른 봉우리들 뭉클 솟아오른다 굽은 능선 위로 생각의 실마리들 날아다닌다 뭐였더라, 뭐였더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의 바람소리 生覺한다는 건 生을 깨닫는다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生은 오리무중이니 생각이 깊을수록 生은 첩첩산중이니 생각대로 쉬운 일은 세싱에 없어 생각을 버려야 살 것 같은 날은 마음이 종일 벼랑으로 몰린다 생각을 버리면 안된다는 생각 생각만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 생각 때문에 밤새우고 생각 때문에 날이 밝는다 생각이 생각을 놓아주지 않는다 지독한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 생각이 사람을 만든다 / 천양희 뒷 짐 지고 창 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옆의 동료가 무슨 생..

시읽는기쁨 2008.09.09

너무 많은 입 / 천양희

재잘나무 잎들이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재잘된다 잎들이 많고 입들이 너무 많다 이(李) 시인은 마흔살이 되자 나의 입은 문득 사라졌다 어쩌면 좋담,이라 쓰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좋담 쉰살이 되어도 나의 입은 문득 사라지지 않고 목쉰 나팔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좋담? 다릅나무 잎들이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다른 소리를 낸다 잎들이 다르고 입들이 너무 다르다 - 너무 많은 입 / 천양희 지구는 시끄럽다. 수많은 전파와 소리로 뒤덮여 지구 역사상 이만큼 소란한 적도 없었을 것이다. TV를 켜면 수십 개 채널이 아우성이고 컴퓨터에서도 무수한 말들이 난무한다. 우리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가 '과잉'이다. 과잉 생산, 과잉 소비, 그리고 거기에 더해져 과잉의 말들도 있다.우리는 과잉의 중독 환자들이다. 현..

시읽는기쁨 2007.01.29

뒤편 / 천양희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 뒤편 / 천양희 나이가 든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도리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그리고 화려함 뒤에 숨어있는 아픔을 읽을 줄 아는 것이다. 행복한 웃음 뒤에 있는 쓸쓸함과 외로움을 보는 일이다. 남루한 행색의 나그네에게도 나름대로의 기쁨과 감사가 있음을 이해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종소리 울려퍼지는 성당 안에서는 지금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일이다.

시읽는기쁨 2006.07.04

사람의 일 / 천양희

고독 때문에 뼈아프게 살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고통 때문에 속 아프게 살더라도 이별하는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사람을 다칩니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사람과 만나면 우린 또 허기집니다 언제까지 우린 사람의 일과 싸워야 하는 것일까요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합니다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라고 우린 또 사람을 기다립니다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 사람의 일 / 천양희 그렇다. 모두가 다 사람의 일이다. 사람 때문에 아파하고, 그 사람으로 인하여 희망이 생긴다.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해진다. 오늘이 그렇고, 내일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과 헤어지면 우린 늘 허기지고,..

시읽는기쁨 2006.01.18

평화, 그 먼 길 간다

가수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평화를 기원하는 거리 공연이 매주 화요일 저녁에 광화문 교보빌딩 옆에서 열리고 있다. 어제 친구와 만나서 이 공연에 동참하기로 했는데 저녁 식사 후 술 한 잔 하는 자리에서 쓸데없는 종교 논쟁을 하는 바람에 늦어져서 공연이 끝날 때쯤 되어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평화, 그 먼 길 간다'라고 적힌 무대는 생각보다 간소했고, 사람들은 보도에 앉거나 서서 두 분의 뜻에 동참하며 열띤 호응을 보냈다. 두 분은 이 땅과 생명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환경과 반전, 소외계층을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계시지만, 이번 거리 공연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직접 시민들과 만나며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정태춘 음악과의 인연은 10여 년 전 독일 연수를 갔을 때 맺어졌다. 우리..

사진속일상 2005.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