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 8

정림사지5층석탑

현존하는 백제의 석탑은 두 개인 걸로 알고 있다. 미륵사지와 정림사지에 있는 석탑이다. 정림사지석탑이 미륵사지보다 후대에 만들어졌고 크기도 적지만 미적인 면에서는 앞선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면서 예쁘다. 정림사(定林寺)는 백제의 사비 도읍기(538~660)에 건립된 사찰로 사비도성 내부의 중심지에 있다. 고려시대 때 제작된 기와 명문으로 정림사라 칭하고 있지만, 백제시대 때 절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절은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정림사지5층석탑은 국보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하는 과정의 시원양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 석탑이다. 이 석탑은 전에는 '평제..

사진속일상 2020.07.19

선림원지에 가서 / 이상국

선림(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 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 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선림 쪽에서 나오네 천 년이 가고 다시 남은 세월이 몇 번이나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 채는 아직 면산(面山)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소처럼 선림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이 지천인데 경전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

시읽는기쁨 2014.10.17

불국사와 감은사지

대구에 간 길에 잠시 경주에 들렀다. 굳이 불국사에 찾아간 것은 조용한 불국사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서너 차례 불국사에 갔지만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늘 시장통만큼 복잡했다. 잠시 수학여행이 금지된 틈을 이용해서 불국사의 다른 맛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도 관람객이 많았지만 전과 같은 방해를 받지는 않았다. 법당의 스님 독경 소리에서는 고요한 산사 분위기가 났다. 다만 너무 다듬어진 절이어서 성형 미인을 보는 것 같이 자연스러움이 부족했다. 이런 불국사의 분위기를 대표하는 게 다보탑일 것이다. 언제 보아도 다보탑의 조형미는 빼어나다. 시대의 정형을 뛰어넘은 독창성에 감탄한다. 옆에 있는 석가탑은 현재 수리중이다. 석재는 완전히 해체되어 밑바닥이 드러나 있다. 중학생일 때 수학여행으로 불국사에 처음..

사진속일상 2014.05.17

거돈사지 민들레

거돈사지 텅 빈 절터에 드문드문 민들레가 피어 있다. 적막하고 쓸쓸한 풍경에 샛노란 민들레 색깔이 선명하다. 아마 이곳은 잡초가 자라지 못하도록 관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 틈바구니를 뚫고 태어난 생명이다. 키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 채 급하게 꽃부터 피어올린 것 같다. 폐사지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무상한 자리지만 생명에게는 의당 꽃 피워야 할 자리일 뿐이다. 큰 느티나무를 보러 갔다가 키 작은 민들레에도 마음을 앗겼다.

꽃들의향기 2014.04.15

거돈사지 느티나무

천 년의 거목이다. 원주시 부론면 거돈사지에 있다. 거돈사(居頓寺)는 신라 시대에 창건되고 고려 초기에 번창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넓은 절터에는 삼층석탑만이 그나마 온전히 남아 있다. 폐사지 입구 축대 가장자리에 이 느티나무가 있다. 예전에는 절을 찾아오는 순례객을 제일 먼저 맞아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이 무너진 지 400년이 넘었다. 수많은 인간의 사연들이 허공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본 느티나무의 심정은 어떠할까. 느티나무 옆에 서 있으면 덧없는 생의 피곤함이 느껴지는 것도 같다. 흥하고 쇠하는 만물의 이치를 온몸으로 터득한 성자처럼 느티나무는 묵묵히 서 있다.

천년의나무 2014.04.15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서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고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휴대폰을 끄고 연락을 끊은지 석 달이 되어간다. 몇 친구에게는 잠수중이라고 알렸지만, 대부분에게는 아무 소식 주지 못했다...

시읽는기쁨 2014.03.28

법천사지 느티나무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법천사지가 있다. 법천사(法泉寺)는 고려 중기 법상종(法相宗)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무신정권 이전까지는 지방 문벌 귀족의 후원을 받으며 번창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후 지금까지 폐사로 남아 있다. 폐사지를 느티나무 한 그루가 묵묵히 지키고 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괴목이다. 특히 줄기가 특이한데 사람이 드나들 정도로 큰 구멍이 뚫려 있다. 그런데도 잎을 보면 수세가 왕성하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던 촌로께서 잎이 이렇게 무성하니 풍년이 들 모양이라고 혼잣말을 하신다. 수령이 얼마쯤 되었느냐니까 잘 모르겠단다. 500년은 넘어 보인다고 하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 정도의 나무라면 보호수로 지정되었을 만한데 나무에 대한 설명이 없어 ..

천년의나무 2012.05.09

고달사지 느티나무

폐사지에 서 있는 한 그루 고목만큼 흥망성쇠의 허무함을 말해 주는 것도 없다. 성(盛)하면 쇠(衰)하고 차면 기우는 진리에서 나무라고 예외는 아니지만 폐허로 변한 유적지에 우뚝 서 있는 고목은 인간사의 무상함을 말없는 말로 전해준다. 여주 고달사지 입구에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이가 400 년이 되었다니까 고달사가 폐사된 경위를 이 나무는 알고 있을지 모른다. 전에는 이 주위에 마을이 있었다는데 그렇다면 사하촌의 당산나무였을 수도 있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복구를 끝낸 허허벌판 절터에서 이 느티나무는 단연 돋보인다. 고달사지 느티나무는 곱고 단아하게 생겼다. 가까이서보다는 멀리서 볼 때 더욱 그렇다. 곱게 늙어가는 참한 여인네가 연상된다. 이 느티나무의 높이는 18 m이고, 줄기 둘레는 4...

천년의나무 2009.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