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 33

생강나무꽃

생강나무꽃은 이른 봄 숲의 황일점(黃一点)이다. 대부분 나무가 아직 초록 잎을 내기 전에 노란 물감을 콕콕 찍어 놓은 듯한 생강나무꽃은 등산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봄이 왔음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꽃이다. 생강나무꽃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욱 귀엽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햇병아리가 조잘대는 것 같다. 생강나무는 한방에서 황매목(黃梅木)이라고 하는데, '노란 매화나무'란 이름이 잘 어울린다. 그 외에 개동백, 산동백이라 하지만 강원도에서는 그냥 동백, 동박이라고도 부른다. 실제 동백과 닮은 데를 찾자면 생강나무 열매에서 짜낸 기름이 동백기름 대용으로 쓰인다는 정도일 것이다.

꽃들의향기 2014.03.31

진관동 느티나무

수령 200년 전후의 느티나무 네 그루가 모여 있다. 주변은 '은평 한옥마을'을 조성하기 위한 넓은 공터다. 진관사 들어가는 입구인데 집터로는 괜찮아 보인다. 그러나 몇 년째 빈터로만 남아 있는 걸 보니 사업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오래된 느티나무로 보아 옛날에는 이곳에 큰 마을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진관사가 흥했던 시절이었다면 사하촌이 있었을 법도 하다. 새 주택단지를 만들겠다고 옛 흔적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고, 쓸쓸한 느티나무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천년의나무 2014.03.31

아내와 비봉에 오르다

아내와 북한산에 올랐다. 원래 계획은 비봉능선을 타고 보현봉까지 갔다가 사자능선으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등산로가 가파르고 바위가 많아 일찍 지치는 바람에 계획한 길의 반밖에 가지 못하고 비봉에서 하산했다. 뒷산 정도에 적응된 체력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북한산이 암산(岩山)이라는 걸 이번에 새삼 확인했다. 응봉능선으로 내려가면서 본 의상능선의 연이은 바위봉우리가 대단했다. 언젠가는 지나가 보고 싶은 능선이다. 바위산은 보기에는 좋지만 걸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이제 우리 수준에는 북한산 둘레길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족두리봉. 비봉. 재미있게 생긴 바위들. 7km 정도의 산길이었는데 여섯 시간 가까이 걸렸다. 거친 숨 고르느라 쉬고 또 쉬었던 산행이었다. * 산행 시간; 5시간 30분..

사진속일상 2014.03.31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서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고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휴대폰을 끄고 연락을 끊은지 석 달이 되어간다. 몇 친구에게는 잠수중이라고 알렸지만, 대부분에게는 아무 소식 주지 못했다...

시읽는기쁨 2014.03.28

논어[76]

자화가 제나라로 사신 갈 때 염선생이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식량을 청한 즉, 선생님 말씀하시다. "한 가마니쯤 보내지." 좀 더 청한즉, 선생님 말씀하시다. "한 섬쯤 보내렴." 염선생이 열 섬의 곡식을 보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적이 제나라로 갈 제 살찐 망아지를 타고 가벼운 털옷을 입었다. 나는 들었다. '참된 인간은 급한 경우를 모면할 뿐 재물을 늘리지 않는다'고." 子華 使於齊 염子 爲其母請粟 子曰 與之釜 請益曰 與之庾 염子與之粟五秉 子曰 赤之適齊也 乘肥馬 衣輕구 吾聞之也 君子周急 不繼富 - 雍也 2 자화가 제나라에 사신 가는 대가로 염선생이 공자에게 곡식을 청했다. 염선생은 공자가 주라고 하는 것보다 열 배나 더 많은 양을 자화의 집에 보냈다. 제멋대로 한 제자에게 공자는 언짢았을 것이다. ..

삶의나침반 2014.03.27

영장산길을 걷다

홀로 산길을 걷는 것을 나는 '풍요로운 고독'이라고 이름 붙인다. 외롭거나 허기진 고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서 떠난 대신 구름 친구, 바람 친구, 나무 친구, 꽃 친구, 새 친구가 나를 반겨준다. 유쾌한 벗들로 둘러싸인다. 평일에 산길을 걸으면 몇 시간 동안 한두 사람 스치는 게 고작이다. 그 여백이 무한 즐겁다. 정신 수양으로 한적한 산길 걷기만큼 좋은 건 없다. 때를 벗기려 목욕탕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이라는 퇴계의 시에 보면, 산을 유람하는 것이 책 읽는 것과 같다는 구절이 나온다. 산길을 걷고 나면 좋은 책 한 권 읽은 것 같은 정신의 청량함을 맛본다. 산에 들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이유는 욕심이 비워지기 때문이 아닐까. 땀이 밸 듯 걷다 보면 세상의 근심과 걱정..

사진속일상 2014.03.26

청계산에서 봄꽃과 놀다

산에 들어 꽃과 놀 때가 제일 행복하다. 꽃을 찾고 사진을 찍는 행위에 온전히 몰입하는 시간이다. 잡념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 깊은 명상에 들었을 때와 비슷하다. 사람의 마음은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에 집중하고 몰입할 때 맑고 투명해진다. 오늘은 청계산 옛골에 들었다. 골짜기에는 환상적일 정도의 아름다운 화원이 펼쳐져 있었다. 꿩의바람꽃, 노루귀, 복수초는 원 없이 만났다. 가까운 곳에 이런 야생의 꽃밭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기쁨이고 행복이다. 꿩의바람꽃 노루귀 복수초 현호색

꽃들의향기 2014.03.25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딸네 집에 갔다가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책을 펴고는 단숨에 읽었다. 돋보기를 가져가지 않아 침침한 눈이었지만 한 번 빠져드니 헤어나지 못했다.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는 돈과 외모지상주의에 맹종하는 우리 사회의 비인간적 시스템을 고발한다. 소수의 권력자가 다수를 지배하는 전략이 부와 아름다움에 대한 신화를 부풀리는 것이다. 돈과 예쁜 여자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대중은 부나비처럼 부와 아름다움을 향한 경쟁 대열에 뛰어든다. 소수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하는 것이다. 가혹한 세상에 들러리를 선 시녀의 처지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못생긴 여자와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여자는 놀림을 받고, 소외되..

읽고본느낌 2014.03.25

서대문독립공원 홍매

산청의 정당매(政堂梅)가 고사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다가 고매화(古梅花)를 감상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서대문독립공원을 산책하다가 홍매를 만났다. 탐매 행렬에 끼여 남녘까지 달려가진 못하지만, 서울 도심에서 만나는 매화도 색달랐다. 어쩜 색이 이리 고울 수 있을까. 매화는 가까이서보다는 약간 떨어져서 볼 때 더 운치 있다. 눈이라도 살포시 덮인다면 금상첨화이리라.

꽃들의향기 2014.03.24

풍경(31)

흰 그림자.... 흑백필름을 현상하면 음영이 거꾸로 되어 나타난다. 거기에 빛을 비추어야 우리가 정상이라고 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림자가 꼭 검어야 할 당위는 없다. 뒤집힌 세계 역시 하나의 세계다. 필름의 기억이 떠올라 재미삼아 음영을 바꾸어 보았다.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으로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

사진속일상 2014.03.24

베란다의 봄

지난겨울에는 화분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그냥 방치해 놓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봄기운은 베란다에도 찾아왔다. 가까이 가면 색깔과 향기가 완연히 다르다. 그중에서도 사시사철 꽃을 피우는 제라늄이 기특하다. 지난 연말에 제주도행을 계획했을 때는 이 화분을 전부 어찌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고, 이제는 얘들과 어쩔 수 없이 같이 지내게 되었다. 가까이 다가가 귀 기울이면, 차라리 잘 되었어요, 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나도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사진속일상 2014.03.21

논어[75]

애공이 물었다.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는 누구입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안회란 애가 있어 학문을 좋아했지요. 가난 속에서도 투덜대는 일이 없었고, 허물도 두 번 다시 짓는 일이 없더니, 불행히도 일찍 죽고 시방은 없습니다. 아직은 학문 좋아한다는 애의 이야기를 못 듣고 있습니다." 哀公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 雍也 1 이번에는 애공이 호학(好學)에 대해 묻는다. 호학이 배움을 좋아한다는 의미를 넘어 삶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임을 공자의 대답에서 다시 확인한다. 공자는 안회를 떠올리며 호학하는 사람의 두 가지 특징을 말한다. '불천노(不遷怒)'는 화를 다른 대상에게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소인은 계속해서 투덜대고 화풀이를 한다. 마당의 ..

삶의나침반 2014.03.21

거꾸로 가자 / 윤재철

짧게 가자 빠르게 가자 무의미하게 가자 그녀는 잊기 위해 드라마로 간다 그녀는 알레고리에 익숙하다 판타지에 익숙하다 리얼리즘은 천박해 부담스러워 상징적으로 가자 모자 쓰고 가자 가리마도 가리고 바로 클라이맥스로 간다 한일강제합병은 모른다 진주가 어디 붙어 있는 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에 익숙하고 온갖 암호와 예측에 충분히 익숙하다 나는 거꾸로 가자 예측 불가능하게 가자 벌거벗은 몸뚱이로 가자 저 강변 항하사 같은 금모래밭 남풍에 반짝이며 팔랑이는 미루나무 이파리 그 오르가슴을 나는 잊지 못한다 - 거꾸로 가자 / 윤재철 세상 사람들과는 거꾸로 살아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일 듯하다. 오히려 그게 제대로 사는 길인지 모른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 아니오, 라고 답하라. 계단을 내려가면 ..

시읽는기쁨 2014.03.20

희망

은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신 뒤인 2011년에 나온 산문 선집이다. 선생이 어떤 분이시고 사상의 바탕은 무엇인지 이 책 한 권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인간적 면모가 진솔하게 드러난 글이 많다. 선생은 글을 쉽게 쓴다. 학자인 체하는 어려운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중학생만 되어도 이 책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이 글을 쓰는 목적은 오직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잠자는 민중을 깨우기 위해서는 누구나 알 수 있게 쉽게 써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선생이 존경하는 노신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시절의 선생은 노신의 글을 읽으면서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에 감동했다고 한다. 단순히 지식을 상품으로 파는 것에 안주하는 교수나 문예인이 아니라, 고난받는 이웃과 함께하려는..

읽고본느낌 2014.03.19

베란다에 핀 별꽃

베란다에 있는 버려둔 화분에서 덩굴이 나오고 초록 잎이 생기더니 조그만 흰 꽃이 피었다. 뭔가 궁금했는데 별꽃이었다. 산에 있는 흙을 가져와 화분에 담아 놓았더니 별꽃 씨도 같이 따라온 모양이었다. 베란다의 따스한 기운에 제 고향에서보다 일찍 꽃을 내었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꽃은 눈에 띄지도 않는다. 들에서는 보잘것없는 잡초라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별꽃은 그렇게 숨어서 반짝인다. 작은 꽃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얼마나 많은 인연의 씨줄 날줄이 교차해 여기서 꽃이 핀 것일까? 작은 꽃 하나에 경건해지는 아침이다. 땅에 납작 엎드려 피는 꽃, 별꽃을 아시나요 나무들이 눈을 틔우기 전에, 우수 경칩도 오기 전에 볕 좋은 곳이라면 어디서건 순백의 별로 뜨는 꽃 어젯밤 하늘 쳐다보다 떨어져 다친, 사람의..

꽃들의향기 2014.03.18

덕분입니다

덕분, 참 좋은 말이다. 한자로 쓰면 '德分'이 된다. "덕분입니다"는 당신이 나에게 덕을 베풀어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이다. 덕을 나누면 모두가 행복하다. 그에 비해 새해 인사말로 쓰이는 "복 많이 받으세요"는 좀 욕심꾸러기 같은 느낌이 난다. 세상의 복 분량은 한정되어 있는데 혼자서 복을 많이 가져가면 다른 사람의 몫이 줄어든다는 건 모른다. 아쉽게도 "복분(福分) 합시다"라는 덕담은 없다. 어느 분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명함만 한 종이를 나누어 주는 걸 보았다. 거기에는 직접 붓글씨로 쓴 '덕분에'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항상 이런 마음으로 살자는 뜻이리라. 전에 천주교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대개 사람들은 잘못되면 네 탓이오, 잘 되면 내 탓이라고 한다. 이러면 분쟁과 싸움..

참살이의꿈 2014.03.17

논어[74]

선생님 말씀하시다. "자그마한 고을에도 나만큼 성실한 사람은 있겠지만, 나만큼 학문을 좋아하지는 않을거다."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 - 公冶長 16 '호학(好學)'을 우리말로 옮기면 어떻게 될까? 단순히 '학문을 좋아함'이나 '배우기를 좋아함'이라고 하면 뭔가 미흡하다. 호학에는 더 깊은 뜻이 숨어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공자가 호학하는 사람을 자신과 안회로만 제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학은 행(行)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첫머리에서 '學而時習之'라고 했을 때, '학(學)'과 '습(習)'이 나누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실천되지 않는 배움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배운 그대로를 생활로 옮기는 태도야말로 호학의 기본 정신이다. 입시 준비를 하는 학생이나 고시촌 풍경을 호..

삶의나침반 2014.03.14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는 사람들 소식이 연이어 들린다. 보도에 나오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선택을 하는지 가슴이 아플 따름이다. 지병으로 일을 할 수 없어 생활비를 벌지 못하게 된 어머니는 두 딸과 함께 이승을 버렸다.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시읽는기쁨 2014.03.13

너도바람꽃의 미소

무갑산 계곡에서 너도바람꽃과 만나다. 올해도 너의 예쁜 모습 보여줘서 고마워.... 무갑사 주지 스님께서 계곡 입구에 손수 쓰신 시를 걸어 놓았다. 우리들을 보려고 먼길을 달려 숲속까지 눈꽃송이 같은 꽃망울을 터트리며 와~ 모두 예쁘게 활짝 피고 고요한 마음을 내어서 기다려 세상에 우리들이 알려진다네 - 바람꽃들의 마음 / 법수 스님 세상에 알려지는 게 너에게는 수난의 시작이구나. 너의 모습은 새디스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가련한 여인 같다. 그래도 예쁜 미소 잃지 않는 네가 대견하구나, 사랑스럽구나....

꽃들의향기 2014.03.12

노예 12년

인류의 슬픈 역사를 증언하는 영화다. 불과 100여 년 전에 이런 비극의 역사가 있었다. 흑인은 소유물이었지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노예 수입이 금지되어 흑인 납치 사건이 만연하게 된 1840년대 미국, 가족과 자유로운 삶을 즐기던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납치되어 남부 루이지애나로 팔려간다. 나쁜 제도와 인간의 탐욕이 만날 때 얼마나 사악한 일이 벌어지는지 이 영화는 보여준다. '노예 12년'은 한 개인의 비극적인 삶을 그리고 있지만, 사회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누가 노예인가? 그렇다면 노예주는 자유인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노예주 또한 사회적 이데올로기나 고정관념의 노예일 뿐이다. 영화에 나오는 악명 높은 주인 역시 돈과 정욕의 노..

읽고본느낌 2014.03.11

한 장의 사진(18)

인생에서 그나마 아름다운 시절은 유년이 아닐까 싶다. 유년은 가족의 축복 가운데 태어나서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는 때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 가사 그대로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년의 기억은 대부분 망각의 늪으로 가라앉았다. 간신히 남은 몇 개의 기억이 따스했던 그 시절로 나를 데려가 준다. 삭막한 인생살이에 지친 몸이 쉬어가는 오아시스가 바로 유년의 기억이다. 내 의식에 남아 있는 최초의 기억은 아마 서너 살 무렵의 일이었을 것이다. 따스한 봄날이었는데 시골 동네에는 잔치가 있었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은 새 옷을 곱게 차려입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나도 고모 등에 업혀서 한 손에는 풍선을 들고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골목길은 시끌벅적했다. 그런..

길위의단상 2014.03.10

논어[73]

안연과 계로가 선생님을 모시고 있을 때, 선생님 말씀하시다. "너희들 소원을 한 번 말해 보련?" 자로가 말했다. "수레나 망아지나 예복이나 가벼운 가죽옷들을 친구들과 한께 쓰다가 부수어지더라도 나는 서운할 것 없습니다." 안연이 말했다. "잘한 것을 내세우고 싶지도 않고, 남에게 수고를 끼치고 싶지도 않습니다." 자로가 말했다. "선생님의 말씀도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 말씀하시다. "늙은이를 편안하게 해 주고, 친구들과는 신의로 맺고, 어린이들이 따르도록 하련다." 顔淵季路侍 子曰 합各言爾志 子路曰 願車馬衣輕구 與朋友共 폐之而無憾 顔淵曰 願無伐善 無施勞 子路曰 願聞子之志 子曰 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 公冶長 15 스승과 제자 사이의 대화가 정겹다. 따스한 봄날에 소풍이라도 나가서 담소하는 분위기..

삶의나침반 2014.03.09

인간의 대지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돋보이는 책이다. 생텍쥐페리는 조종사라는 개인적 체험을 서정적이고 사색적인 산문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기능적이기만 한 조종사가 아니라 하늘을 날면서 내려다보는 넓은 세상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비행은 그에게 있어 인간 완성을 추구하는 초월적 모험이었다. 감칠맛이 나는 생텍쥐페리의 글은 인생에 대한 사색으로 우리를 이끈다. 나는 누구이고,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인간은 어떤 역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살아내야 할 책임이 있다. 안데스 산맥에서 추락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기요메를 통해 이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정확히 말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우에 대한 책임감은 전 인류를..

읽고본느낌 2014.03.07

봄이 오는 뒷산

창밖으로 보이는 소나무가 아침부터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 있어서 센 바람을 맞고 싶어 뒷산에 올랐다. 때가 되면 변해가는 계절은 속일 수 없음인가, 산 능선에서 바람 앞에 섰으나 이미 찬 기운은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명색이 북풍인데 신세가 말이 아니었다. 한껏 잠바를 열어젖히고 가슴이 뻥 뚫리도록 바람을 맞았다. 겨울 동안은 전혀 출입을 하지 않았으니 석 달 만에 찾은 뒷산이었다. 봄이 가까워지면 숲에서는 새들이 먼저 분주해진다.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다니며 바쁘기만 한 박새가 제일 많이 눈에 띄었다. 찌찌 쯔르르르, 새소리가 없다면 숲은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 산기슭에는 괭이눈 초록 잎이 돋아났고, 버들강아지도 고운 물을 들이고 있었다. 이제 곧 총천연색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다. 행복이..

사진속일상 2014.03.06

애국자가 없는 세상 / 권정생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테고 대포도 안 만들테고 탱크도 안 만들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 애국자가 없는 세상 / 권정생 김연아 선수가 소치 올림픽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녀의 마지막 무대는 존 레논의 '이매진'을 배경 음악으로 한 갈라쇼였다. '이매진'은 반전 평화의 메시지를 가진 ..

시읽는기쁨 2014.03.06

하느님은 한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어주신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극장, TV, CD 등으로 아마 대여섯 번은 보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중심인 뮤지컬 영화지만, 나에게는 힘들 때면 꼭 기억나는 영화 속 대사가 하나 있다. 마리아가 수녀원에서 나오며 두려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하는 독백이다. "하느님은 한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어주신다!" 사는 게 뜻대로 안 되고 답답할 때면 문득 이 말이 떠오른다. 그래, 하느님은 한 문을 닫으시면 다른 문을 열어주시는 거야. 이렇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면 어느새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에게는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주문과 같은 말이다. 옛말에도 곤궁이통(困窮而通)이 있다. 궁하면 통한다는 뜻이니 둘 다 비슷한 의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위기는 기회며, 끝은 곧..

참살이의꿈 2014.03.05

수리산 변산바람꽃과 노루귀

수리산에서 변산바람꽃을 만나는 것으로 한 해의 꽃 데이트가 시작된다. 산에 피는 꽃 중에서는 변산바람꽃이 제일 먼저 개화하기 때문이다. 수리산을 기준으로 한다면 2월 하순에서 3월 중순 사이에 활짝 핀 변산바람꽃을 볼 수 있다. 올해는 평년보다 약간 빠른 편이다. 병목안에서 올라가는 계곡에 변산바람꽃이 피어난다. 2006년에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그때는 수백 송이가 피어 있던 군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이 사라졌고, 십여 포기 정도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은 탓이다. 몇 년 전까지도 사진사들로 북적댔는데 꽃이 별로 없으니 이젠 찾아오는 사람도 드물다. 소문에 의하면 옆 계곡으로 몰려갔다고 한다. 이곳의 변산바람꽃에게는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이 그래서일까, 금년의 변산..

꽃들의향기 2014.03.04

논어[72]

선생님 말씀하시다. "말을 꾸며대며 얌전한 체 굽실굽실하는 짓을 좌구명은 수치로 여겼다. 나도 수치로 여긴다. 원한을 품은 채 친구인 체하는 짓을 좌구명은 수치로 여겼다. 나도 수치로 여긴다." 子曰 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 公冶長 14 꾸미거나 위선을 떠는 삶을 공자는 싫어했다. 정직한 사람이란 겉과 속이 일치한다. 없으면서 있는 척, 모르면서 아는 척, 싫으면서 좋은 척하는 행동은 자신을 과시하거나 또는 아부해서 이득이나 대가를 바랄 때 하는 짓이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이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자신에게 솔직한 것이 사람됨의 바탕이다. 에 여러 번 나오는 '교언영색(巧言令色)'은 아첨과 가식을 가리키는 대명사다. 이어서 나오는 '주공(足恭)'은 과공(過恭)과..

삶의나침반 2014.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