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장자[79]

샌. 2009. 7. 18. 18:49

길 가는 세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 미혹되었다면

목적지를 갈 수 있을 것이다.

미혹된 자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미혹되면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다.

미혹된 자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세상이 미혹되었다.

내가 비록 인도하려고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슬픈 일이 아닌가?

훌륭한 음악은 속인의 귀엔 들리지 않고

절양과 황화 같은 부화한 속악(俗樂)에는 환호한다.

이처럼 고귀한 담론이

대중의 마음에 와 닿지 않으니

참된 말은 나타나지 않고 속된 말만 기승을 부린다.

옹기소리와 종소리가 엇갈리니

갈 곳을 모른다.

지금은 온 천하가 미혹되었으니

내가 비록 향도한다 한들 어찌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힘쓰는 것은

또 하나의 미혹이다.

그러므로 포기하고 추구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추구하지 않으면

누가 진실로 더불어 걱정할 것인가?

문둥이가 야밤에 아기를 낳으면

황급히 등불을 들고 바라본다.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운 것이다.

 

三人行而一人惑

所適者猶可致也

惑者少矣

二人惑

則勞而不至

惑者勝也

而今也 以天下惑

予雖有祈嚮 不可得也

不亦悲乎

大聲不入於里耳

折楊皇華 則합然而笑

是故高言

不止於衆人之心

至言不出 俗言勝也

以二缶鍾惑

而所適不得矣

而今也 以天下惑

予雖有祈嚮 其庸可得邪

知其不可得也 而强之

又一惑也

故莫若釋之而不推

不推

誰其比憂

려之人 夜半其生者

遽取火而視之汲汲然

唯恐其似己也

 

- 天地 10

 

장자가 세상을 등지고 세상을 버린 은둔자의 삶을 살려고 했다는 것은 오해다. 장자는 적극적으로 세상을 개혁하려 했으며 더 나은 공동체를 추구한 현실 속의 이상주의자였다. 장자가 지향한 것은 세속 속에서의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다. '與世俗處'라는 말이 나타내듯 출세간(出世間)은 장자의 이념과는 다르다. 이것이 장자와 불교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는 그런 장자의 고뇌가 잘 느껴진다. 동시에 미혹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는 한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울분도 나타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진리에는 귀를 닫고 속된 말만 따라간다. 장자가 아무리 바른 길을 외쳐도 세상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힘쓰는 것은 또 다른 미혹이라며 자조 섞인 한탄을 한다.

 

그런데 장자 시대의 상황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른 게 없다. 진리는 여전히 외면 받고 대중들은 시세만 따른다. 권력을 잡은 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민중들을 이용해 먹는다. 또 그런 세력에 부화뇌동하는 무지한 속인들도 많다. 아니 대다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이 변하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미혹된 자가 많기 때문이다. 2천 년 전의 장자의 말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의 '문둥이가 야밤에 아기를 낳으면 황급히 등불을 들고 바라본다.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운 것이다.'라는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문둥이가 아기를 낳고는 자신을 닮지 않았을까 염려스러워 등불을 켜고 살핀다. 바로 그런 모습이 장자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잘못 돌아가는 세상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 볼 수밖에 없는 장자의 답답한 마음을 나타내주는 예화라고 보고 싶다.문둥이 역시 너무나 자식을 사랑하므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혹인 줄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다. 그것은 장자가 세상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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