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랑탕 트레킹(14)

샌. 2009. 3. 1. 18:15



2009년 1월 21일, 랑탕 트레킹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오늘은 순다리잘까지 걸어가서는 버스를 타고 카트만두로 들어간다. 아침에 일어나니 주변은 온통 뿌연 안개에 잠겨 있다. 아직도 2천m급의 고지대지만 안개는 마치 깊은 바다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하긴 내가 서 있는 이곳도 수 억 년 전에는 바다 속이었을 것이다. 잠시 내 주위로 고생대의 바다 생물들이 헤엄치고 돌아다니는 상상을 해본다.


안개가 낀다는 것은 오늘도 날씨가 맑다는 뜻이다. 이번 트레킹을 계획대로 마칠 수 있게 된 데는 날씨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우리 일정이 하루의 여유도 없이 빡빡하게 짜여져 있어서 만약 중간에 눈이라도 내렸다면 중도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보다 앞서 트레킹을 한 팀은 폭설로 고사인쿤드에 가지 못하고 귀환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트레킹 내내 맑은 날씨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안개 속의 치소파니를 출발하자마자 바로 쉬바푸리(Shivapuri) 야생보호구역이 나왔다. 카트만두 북쪽에 있는 이 지역은 현재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네팔의 희귀 보호종이 많이 서식하고 있으며, 특히 카트만두의 주요 상수원이기도 하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는데 역시 다른 곳에 비해 자연 그대로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정해진 길을 따라 계속 남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본 히말라야 설산의 모습이다. 작은 고개를 넘고 난 뒤부터는 설산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안녕, 히말라야!”






날은 따뜻하기가 우리의 5월과 비슷했다. 쉬바푸리 국립공원 안에서는 여러 가지 꽃들을 만났다. 그중에서 네팔 국화인 붉은 랄리구라스 꽃을 처음으로 보았다. 봄에 핀다는 꽃이 유독 한 나무에서만 일찍 피어 있었다. 가이드가 따준 꽃을 장난꾸러기 C가 머리에 꽂았다. 천연덕스럽게 바보 흉내를 내는 모습에 모두들 파안대소했다.


폐막사만 남은 군부대 터에서 잠시 휴식을 했다.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에서 몇 년 전에 정부군과 마오이스트 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 결과로 왕정이 무너지고 네팔은 의회정치가 도입되었다. 네팔이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자면 정치적 안정이 우선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좀더 내려가니 물카르카(Mul Kharka)라는 마을이 나왔는데 이곳도 쉬바푸리 국립공원 안에 속해 있다. 시멘트로 된 계단 길을 30분 이상 내려가도록 계속되는 큰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 있는 작은 찻집에서 레몬티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 쉬는 도중에 트레킹 초반부터 만났던 티베트에서부터 걸어왔다는 부부와 진주에서 온 팀을 또 만났다. 트레킹을 하다 보면 한 번 본 사람은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며 계속 보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12시에 드디어 우리들 트레킹의 종착지인 순다리잘(Sundalijal)에 도착했다. 그리고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는 식당에서 느긋하게 점심을 먹었다. 카트만두로 가는 전세버스는 신이 난 포터들의 노래와 환호 소리로 진동했다. 카트만두에 들어서면서 포터들은 자신들의 집이 가까운 곳에서 하나씩 내리며 아쉬운 이별을 했다. 두 주일간 산에서 동고동락한 사이이니 비록 말은 잘 통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히말라야를 닮아 맑고 순수한 그 청년들의 행복을 마음으로 빌었다.




네팔에 도착했을 때 처음 만난 카트만두의 쇼크는 이제 진정되었다. 도저히 이해 불가능할 것 같은 이질감은 신기함과 호기심과 경탄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카트만두는 재미있고 사랑스러운 도시라는 생각도 들었다. 소음과 매연, 무질서와 혼잡이 온통 뒤범벅된 이 도시가 왠지 정겨우면서 사람 사는 냄새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버스는 잠시 정차하고 네팔에 처음 온 네 사람만 보우다나트(Boudhanath) 사원에 들렀다. 이 사원은 티베트 불교의 성지로 주변에 티베트 절과 거주지가 있어 티베트 문화의 중심지라고 한다. 중앙에 있는 흰색의 스투파에 부처님의 눈이 그려져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주마간산이 따로 없었다. 시간에 쫓겨 가이드를 따라 스투파를 한 바퀴 돌고는 금방 일행에게로 돌아왔다.


2시 30분에 우리가 처음 묵었던 임팔라 호텔에 도착했다. 그때 이곳의 방이 여인숙 같이 느껴졌는데 산 속 생활을 마치고 지금 보니 그렇게 넓고 안락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인가 보다. 두 주일 만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뽀송뽀송한 내의를 갈아입으니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내일이면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데 봐야 할 것도 많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았다. 몇이서 카트만두의 중심지인 덜발 광장(Durbar Square)으로 나갔다. 타멜 거리를 따라서 20분 정도 걸으니 옛 왕궁이 남아있는 광장이 있었다. 비좁고 더러운 카트만두에서 그나마 현대적 개념의 광장이었는데, 왕궁의 규모로 봐서는 옛날의 화려했던 왕국을 연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서양풍의 근대식 건물도 있었는데 지금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이드가 없어 설명을 들을 수 없으니 수박 겉핥기식으로 그냥 겉모양만 보고 지나칠 뿐이었다. 또한 이곳에는 살아있는 여신이라는 쿠마리가 살고 있는사원도 있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힌두 사원에 소가 한가로이 누워 있는 광경도 보았다. 우리가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한 구루가 모델이 되어 주겠다고 자청을 했다. 고마워서 기념촬영을 했는데 바로 “Give money!"을 외쳐서 실소도 했다. 어쨌든 카트만두는 이방인의 눈에 신기하면서 경이롭게 비쳐졌다. 같은 동양인데도 먼저 서구화된 우리는 서양에 친근하고 네팔 문화에는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원래 우리 삶의 원형은 이런 모습에 가까웠을지 모른다.





호텔로 돌아올 때는 벌써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거리는 사람, 차, 럭셔, 오토바이, 자전거, 쓰레기로 뒤범벅이 되어 혼잡스러웠고 경적과 소음, 매연으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한 여인과 딸이 지키고 있는 작은 가게에서 양털로 만들었다는 파슈미나 목도리를 선물로 샀다. 물건을 못 팔까 안절부절 못하는 모녀의 모습이 눈물겨웠다. 그래도 타멜 거리에 가게를 갖고 있으면 여기서는 웬만큼 사는 쪽에 들 것이다. 수많은 노점상과 걸인들이 길에는 넘쳐났다.


저녁은 ‘짱’에서 삼겹살과 소주로 트레킹 완주를 기념하며 건배를 했다. 네팔에서 맛보는 삼겹살의 맛은 별미였다. 그리고 해냈다는 뿌듯함으로 다들 기분이 좋았다. 되돌아보면 한 바탕 꿈을 꾼 듯한데, 부족함이 없는 트레킹이었지만 왠지 허전하고 아쉬운 기분이 밀려오는 것 또한 어찌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정상에 오른 사람이 느낀다는 감정과 비슷할지 몰랐다. 물론 내년에 다시 올 수도 있겠지만 이번의 첫 경험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히말라야와 카트만두가 주는 두 극단적인 풍경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위안과 평화가 있는 히말라야와 궁핍한 삶의 현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카트만두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히말라야가 관념이라면 카트만두는 현실이었다. 현실을 도외시하고 관념의 세계에만 빠질 수는 없다는 것을, 나 혼자만의 자족과 평화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카트만두는 계속 환기시켜 주었다. 지금 전 세계에는 하루 1 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12억 명이나 된다고 한다. 또 기아로 죽어가는 어린이가 하루에 4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런 비참한 현실 앞에서 무력감과 함께 내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안락이 부끄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히말라야에 들어 구름에 뜬 듯한 기분은 카트만두에 와서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렇게 네팔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어갔다.


2009년 1월 22일,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다. 오전 자유시간에 우리 조 다섯 명은 스와얌부나트 사원을 보러 갔다. 이번에는 택시를 탔는데 정원이 넘어 초과 요금 포함해서 150 루피를 주었다. 네팔 택시는 경차 크기이고 대부분이 일본의 스즈키 제품이다. 요금은 미리 택시 기사와 타협을 해야 한다.





스와얌부나트(Swayambhunath) 사원은 서울의 남산처럼 카트만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산에 자리 잡고 있다. 약 2천 년 전에 건립된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사원이라고 한다. 원숭이가 많아 일명 ‘원숭이 사원’이라고 불리는데, 가보니 원숭이도 많았지만 그보다 개들이 더 많았다. 사원 안도 시내처럼 혼잡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사람과 개, 원숭이, 비둘기가 함께 뒤엉켜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제물을 바치는 등 불공에 열심이었다. 그런 의식들이 우리나라 불교와는 전혀 달라 이색적이었다. 아마 여기서는 힌두교와 불교가 서로 융합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찾아간 날은 안개가 자욱해서 카트만두 시내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시 ‘짱’으로 돌아와 김치찌개로 점심을 먹고 출국 준비를 했다. 공동 경비로 일인당 55,000 루피를 냈지만 트레킹 뒤 정산한 결과 25,000 루피나 되돌려 받았다. 그러므로 두 주 가까이 되는 히말라야 생활동안 우리는 일인당 30,000 루피를 쓴 셈이다. 우리 돈으로는 60만 원 쯤 되니 하루에는 약 4만 원 정도가 들었다고 할 수 있다.




드디어 오후 3시 30분, 우리를 태운 대한항공 비행기는 카트만두를 이륙했다. 왼쪽 창문으로 한동안 히말라야 설산이 나타났다. 좌석이 가운데 자리여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는데 아마 창 곁에 있었다면 눈물이라도 맺히지 않았을까. 돌아보니 고마운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많은 인연들이 얽혀서 내 소망 하나가 이루어졌다.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나는 비행기의 작은 창으로 보였다 사라졌다하는 히말라야에 “나마스떼!”하며 인사를 했다.


“안녕! 히말라야!”


“내년에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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