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동무와 연인

샌. 2008. 5. 30. 09:45

김영민 씨의 글을 읽으면 이름 그대로 영민함이 번뜩인다. 사물을 보는 관점이 신선하고 색다르다. 우리의 통속적인 관점을 가차 없이 또는 잔인할 정도로 조롱하고 가면을 벗긴다. 약간은 현학적인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그의 글에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


이번에 <동무와 연인>이라는 책을 읽었다. 한겨레에 연재되었던 내용을 묶은 것이라고 한다. 역사상에서 주목할 만한 동무나 연인, 사제 관계를 통해 인간관계의 진실을 얘기한 책이다. 서문은 이렇다. ‘동무는 불가능한 것을 가리킨다. 가능하지만, 오직 타락했으므로, 닿을 수 없으므로 가능해지는 사연들을 일컬어 연인이라고 부른다. 가족을 버리지 않으면 스승을 따를 수 없었던 경험처럼, 스승, 혹은 그 지평으로서의 동무의 불가능성을 증명해주는 세속의 덕으로 우리 모두는 친구를 구하고 연인을 사귀며 가족을 얻어 다시 세속에 보은한다.’


이 책에는 스물한 쌍의 관계가 소개되고 있다. 모두가 연인, 동무, 또는 사제 관계이다. 진정한 동무의 관계, 진정한 사랑의 관계, 진정한 사제의 관계가 과연 가능한가? 현실적으로 저자는 여러 사례를 들며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지만 그렇다고 희망을 버리지도 않는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런 진정한 관계를 이루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우리가 통속적으로 생각한 관계들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도 묻게 된다. 저자가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책 내용 중에서 ‘가정’이라는 현대적 관념이 수립된 것이 근대에 들어서였다는 설명이 흥미로웠다. 서양의 경우 가족이 친밀성의 공간이 되고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는 가정으로 변화된 것, 또는 남녀 간의 사랑이 가정 속으로 기입된 것은 18 세기 이후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아이(자식)들이 독자적인 존재로 사랑과 보살핌의 대상이 된 것도 15 세기 이후 점진적으로 진화하면서 19 세기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고 한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현대의 가족제도도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나타난 한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사족이지만 친구와 동무는 김영민 씨가 말한 것과는 의미가 반대가 아닌가 싶다. 저자는 친구를 인간 성숙의 단계에서 ‘듣기 이전의 관계’로, 친구를 ‘듣기 이후의 관계’로 말했다. 동무는 동무(同無)로, 길 없는 길을 함께 걸어가는 관계라는 것이다. 동무는 동지나 친구 이상의 존재다. 그러므로 친구는 여러 명이 가능하지만 동무는 한두 사람밖에 없다. 그러나 예로부터 쓰인 의미는 그 반대로 알고 있다. 주변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은 동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친구는 생각이나 가치관을 공유하는, 즉 뜻이 통하는 동무다. 물론 이런 구분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읽었던 중에서 몇 구절을 인용해 본다.


‘중세는 신(神)이 있다는 듯이 사는 세상이고, 근대는 조국(祖國)이 있다는 듯이 살아가는 세상이고, 현대는 가족(家族)이라는 게 있다는 듯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인간의 사랑은 워낙 어리석은 것이긴 하지만, 무릇 사랑의 현명함을 가꾸려는 이들이라면 살과 말이 섞이는 묘경(妙境)의 이치에 대해 세심해야 한다.’


‘신(神)의 시선이 특별히 나만을 주목하리라는 종교적 환상극, 애인의 관심이 오직 내게만 집중되리라는 연애 환상극, 그리고 엄마-아빠-나 사이를 잇는 완벽한 가족 삼각형의 환상곡 등은 완악한 자기중심성의 인간에게 좀처럼 피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는 치명적인 낭비, 그것이 연애의 본질이다.’


‘사랑은 나르시스나 종교와 함께 사치와 낭비의 본령을 이룬다. 기다리기와 만지기, 애태우기와 속 끓이기, 시간의 지체와 변죽 울리기 등, 연애에 특징적인 이 모든 행태는 그 자체로 도착적이며, 따라서 사랑의 낭비와 비생산성을 극적으로 증명한다.’


‘가족 - 호의로 포장된 지옥’


그리고 연인, 동무, 스승과 제자 관계로 저자의 관심의 대상이 된 짝들은 다음과 같다. 사랑을 낭비며 환상의 물매라고 규정하는 저자에게 그나마 생산적인 연애를 했다고 할 수 있는 경우는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테일러 부인과 밀, 그리고 샤틀레 부인과 볼테르를 들고 있다. 물론 이런 연애는 세상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흉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산적인 연애의 중심 코드는 ‘현명함’, ‘같은 시선’, ‘회의(懷疑)’, ‘자유’, ‘인정(認定)’, ‘살과 말의 조화’ 같은 것, 즉 연인과 동무의 결합에서 이루어진다고 저자는 말하는 것 같다.


1.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 말과 살의 사이


2. 엘로이즈와 아벨라르 : 여자에게는 조국이 없다


3. 이덕무와 박제가 : 학(鶴)과 물소


4. 하이데거와 아렌트 : 사랑, 혹은 최종심급의 지배


5.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애인들 : 동성애와 지적 결벽, 그 양립하기 어려운 자가당착


6. 프로이트와 융 : 호의가 관계를 구원하지 못한다


7. 루 살로메와 니체 : 3, 혹은 살로메의 아이러니


8. 히파티아의 생리대 : 자네가 진정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라네


9. J. S. 밀과 해리엇 테일러 : 현명한 회의(懷疑)의 길


10. 샤틀레 부인과 볼테르 : 예쁘고 명석할 뿐 아니라 말까지 빠른 여자를 애인으로 두는 일에 대한 짧은 보고서


11. 크레이스너와 폴록 : 연애, 인정, 생산


12. 배로와 뉴턴 : 두 명의 아이작, 혹은 뉴턴의 고독


13. 유영모와 김흥호 : 스승, 혹은 제자


14. 윤심덕과 김우진 : 사(死)의 찬미


15. 윤노빈과 김지하 : 님에게


16. 졸라와 드레퓌스 : 지식인의 동무


17. 쇼펜하우어와 그의 어머니 요한나 : 왜 그는 친구(애인)가 없는가?


18. 부처와 가섭 : 주소의 부재에 응답하는 미소


19. 피카소와 애정의 약자들 : 천재, 혹은 이기적인 태양


20. 라시스와 벤야민 : 어긋나는 살과 말


21. 매창과 유희경 : 매창(梅窓) 밖의 이화우(梨花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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