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순교자

샌. 2008. 5. 21. 15:37

세종문화회관에서 연극 ‘순교자’를 관람했다. 아내가 공짜 티켓 두 장을 구해 와서 선택의 여지없이 보게 된 연극이었다. 2층에 좌석을 배정받았는데 관객이 없어서 연극 시작 전에 1층 앞줄로 내려와 가까이서 관람했다. 워낙 무거운 주제를 다루다보니 찾는 사람이 적은 것 같았다.


연극의 무대는 6.25 전쟁 당시의 평양이다. 유엔군의 북진으로 평양에 주둔하게 된 정보부의 이 대위는 공산당 치하에서 순교한 목사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신 목사의 비밀에 의문을 품게 되고 그 비밀을 파헤친다. 결국 죽은 목사들이 순교를 한 것이 아니라 비겁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신 목사는 그런 사실에 입을 다물고 순교한 목사들을 찬양하며 거짓말을 한다. 이 과정에서 신 목사의 인간적 고뇌가 토로되고, 관객들로 하여금 인간 본질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게 한다. 진실과 환상에 대한 해석에서 신 목사와 이 대위는 서로 반대편에 서 있다. 그리고 죽은 박 목사의 딸인 간호장교도 환상이 아니라 진실 편에 선다. 아버지의 광신으로 거의 의절 상태가 된 부녀사이지만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 신에게 기도하기를 거부하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결국 아버지와 화해하게 된다.


이 연극은 보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연극을 보는 동안 나는진실의 편에 서고 싶었다. 거짓말은 인간에게 환상을 품게 하고 일시적으로는 희망을 줄 수 있지만 결국은 더욱 갈등의 구렁으로 빠뜨릴 뿐이다. 진실을 알게 되는 것은 처음에는 혼란스럽고 절망적일 수도 있지만, 거기서 다시 일어서는 긍정의 힘은 크고 위대하다. 신 목사가 당부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내 귀에는 ‘진실에 대한 사랑’으로 들렸다.


만들어진 순교자는 체제 수호와 불쌍한 신자들을 위해 필요하다. 정보부의 장 대령은 공산주의에 대한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순교자가 필요했고, 신 목사에게는 신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순교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순교는 없었다. 그러나 신 목사는 신앙에 대한 회의를 하면서도 신자들을 위해 거짓 사실을 설교한다. 그것이 신자들의 영혼을 편안하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희망을 주기 위하여 자신의 진실을 왜곡한다면 그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


비근한 예로 암에 걸린 환자에게 그 사실을 알려줘야 하는가의 문제는 우리가 가까이서 부딪치는 고민이다. 사실을 알리고 죽음을 준비하게 하든지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게 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거짓 희망이라도 붙잡고 있게 하느냐는 분명한 답이 없다. 환자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반응해야 할지 모른다. 신 목사는 분명히 후자 쪽을 선택했다. 그렇다고 그 선택에 대해 나는 신 목사를 비난할 수 없다. 그 판단은 신 목사의 개인적이고 처절한 실존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주제가 무겁긴 했지만 연극은 단조롭고 일부에서는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전체적으로 관객의 긴장을 이끄는 구성이 아쉬웠다. 특히 순교자들의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는 장면에서 극적인 효과를 낼 수도 있었건만 그저 밋밋하게 넘어갔다. 그래도 연극이 다룬 주제는 묵직했고 그 의미는 반추해 볼 만한 것이었다.


진실과 환상의 갈등 구도에서 연극은 진행되었지만 결국은 순교를 했느냐 안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타인의 순교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나약함이야말로 최후의 진실인지 모른다. 그것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면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나중에는 들었다.


'읽고본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카라에서의 열흘  (0) 2008.07.10
동무와 연인  (2) 2008.05.30
삶을 이길 수는 없죠  (2) 2008.04.02
무서록  (2) 2008.03.31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4) 2008.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