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샌. 2008. 3. 26. 12:56

동화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행복하다. 세상 물정 모르는 허황된 사람이라고 대중들로부터는 빈축을 사지만 그런 사람들의 꿈으로 인하여 세상은 맑아지고 환해진다. 러스킨이 쓴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읽은 뒤의 느낌도 이와 같았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포도밭 일꾼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포도밭 주인은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늦게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나 한 데나리온의 똑 같은 보수를 준다. 이런 처사는 일견 합리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아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도밭 주인의 이런 행동을 합당하다고 말씀하신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러스킨이 포도밭 비유에서 인용한 것인데, 노동자는 공평한 보수로 생존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능력과 경쟁이 최우선시 되는 지금 더욱 숙고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더구나 얼마 전에는 대표적인 기독교 기업인 E에서 비정규직을 해고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지금까지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 이것은 어느 모로 보나 기독교 윤리와는 맞지 않는 처사다. 포도밭 주인의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러스킨이 주장하는 것은 정의와 사랑을 기초로 한 새로운 경제학이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는’은 이런 그의 사회개혁적인 사상을 담은 책인데, 그는 부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부의 획득이란 궁극적으로 정직함이라는 조건 아래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는 사실 부에 대한 욕망과 탐욕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윤을 내는 것이 경제학의 목표다. 그러나 러스킨은 기업인의 이윤 대신에 이타심과 자기희생을, 그리고 고용주와 고용인의 바람직한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본다. 진정한 상인은 돈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높은 생산성이나 이윤이 경제활동의 최고선은 아니다. 대신 정의와 사랑의 바탕에서 얻어진 임금의 평등성과 고용의 안정성이 모두가 ‘윈윈’하는 따뜻한 경제학의 토대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착취적 자본주의 경제 제도 하에서는 내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1만 원은 이웃 주머니 속에 1만 원이 없어졌다는 것과 같다. 부자 되는 수완이란 필연적으로 내 이웃을 계속 가난 속에 방치하는 기술에 다름 아닌 것이다.


경제 시스템을 인간의 이기심에만 내맡기는 사회는 러스킨에게 악몽과 다름없었다. 효율과 경쟁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체제보다는 ‘나중에 온 사람들’도 동등하게 배려 받는 ‘조화로운 불평등’의 사회가 훨씬 더 큰 사회적 부를 창출한다고 러스킨은 주장한다. 물질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요소와 품성이 중요하다. 경제학도 그런 바탕 위에서 세워져야 한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기업이 ‘평생직장’이라든가, 노사간 ‘가족관계’라는 말이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능력이 최우선시 되었고, 무능력자로 낙인찍히면 퇴출되는 것은 당연시되는 분위기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러스킨이 꿈꾼 세상과는 반대로 자꾸만 살벌하게 변해가고 있다.


새로운 이상사회를 꿈꾼 러스킨의 사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순진한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정의와 도덕의 경제를 강조하는 그의 말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에 적용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차가운 자본의 논리만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러스킨의 따스한 경제학이 새삼 더욱 그리워진다. 백 년도 더 전에 그의 사상이 급진적이라고 배척을 받았듯, 지금 역시 그의 사상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사람들은 그의 말에 냉소로 답할 뿐이다.

'읽고본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을 이길 수는 없죠  (2) 2008.04.02
무서록  (2) 2008.03.31
화성인과 금성인  (0) 2008.03.13
소화의 사랑  (0) 2008.03.01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0) 2008.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