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소화의 사랑

샌. 2008. 3. 1. 09:50

동료들과 남도여행을 갔을 때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인 벌교를 찾았다. 소설의 배경이 된 여러 장소들 중에 현부자네 집이 있었다. 벌교읍내와 중도벌판을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양지 바른 곳에 개인집으로서는 으리으리한 기와집을 재현해 놓았는데, 그 옆에 모두가 화장실로 착각한 초라한 집 한 채가 있었다. 나중에 그것이 소화의 집인 줄 알고는 모두가 실소를 했다.

<태백산맥>을 읽은 동료들이 하나같이 소화와 정하섭의 사랑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소화라는 이름난 기억날 뿐그들의 사랑에 대해서는 떠오르는 게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다시 <태백산맥>을 꺼내 들었다. 동료들이 이념 대결보다는 사랑 이야기에 관심을 더 가졌 듯이 나 역시 이번에는 소화와 정하섭의 사랑, 그리고 쫄깃쫄깃한 겨울꼬막 맛이라는 외서댁 이야기에 더 흥미가 갔다.

소화(素花)는 무녀 월녀(月女)의 딸이다. 소화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여자로 묘사되고 있다. 당시 혼란과 격변의 시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쳐 날뛰는 상황 가운데서 오직 사랑의 화신인 듯한 소화는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소화는 벌교의 지주며 양조장 주인인 정사장의 아들인 장하섭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정하섭은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빨치산의 길로 들어선다. 그 때문에 당연히 정하섭 부모는 많은 시련을 겪는다.

당사자들은 모르지만 소화와 정하섭은 맺어질 수 없는 관계다.부자집 아들과 무당이라는 현실적인 신분 차이는 극복될 수 있다지만, 정하섭의 할아버지인 정참봉이 월녀와 바람을 피워서 낳은 딸이 소화다. 그러므로 정하섭에게 소화는 배 다른 고모가 된다.둘이 어릴 때부터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런 핏줄의 인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소화와 정하섭의 사랑은 아름답고 지고지순하게 그려지고 있다. 특히 소화의 경우가 더욱 그렇다. 정하섭은 자신의 활동에 이용하기 위해 소화에게 접근하고 나중에 그것이 소화에게 큰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신분을 뛰어넘은 정하섭의 소화에 대한 사랑 역시 순수하긴 마찬가지다. 어머니를 잃은 소화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 정하섭에게 바친다. 그것은 대가 없는 한결같은 그리움이고 사모함이다.

반면에 외서댁과 염상구, 하대치와 장터댁 사이에는 오직 육체적인 관계만 있을 뿐이다. 쫄깃쫄깃한 겨울꼬막 맛에 빠져든 염상구에게 계속 겁탈 당하는 외서댁은 자살 소동으로 이어지는 비극을 맞는다. 하룻밤에 여섯 번 씩이나 일을 치루는 하대치에 빠진 장터댁 역시 떠나는 하대치를 미련없이 웃으며 보내준다. 둘은 그저 몸의 즐거움에 탐닉하며 서로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고 즐겼을 뿐이다. 이런 것들은 소설을 재미있게 하는 양념 역할을 하지만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하얀 꽃'이라는 이름의 소화는 예쁘고, 영리하고, 착한 여자다. 무녀의 딸로 태어나 신내림을 받고 무녀가 되었지만 정하섭을 만나고 나서는그녀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다. 대가가 없고 이해타산이 없는 순수한 사랑이다. 그녀는 정하섭으로 인해 받게 되는 고통조차 사랑의 힘으로 승화시킨다. 오히려 정하섭을 위해서라면 더 큰 고통이나 희생, 심지어 목숨까지도 바치려 한다. 정하섭의 마음씀 또한 갸륵한데 그는 숨어 지내야 하는 입장이므로 자신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둘의 사랑은 정신적인 것만은 아니고 육체적 합일을 통해 하나로 완성된다. 이때의 사랑은 아름답고 숭고까지 한 의식이다.

한 여인에게서 존재 전체로부터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남자는 행복하다. 그런 점에서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 정하섭은 비록 고생스런 빨치산 활동을 하지만 가장 행복한 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대로 투신해 살면서 한 여인의 지극한 사랑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소화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록 천대와 상처 가운데서성장하고 살았지만, 한 남자를 만나 그를 그리워하고 사모하며 행복해 한다. 그녀에게 이념이나 사상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념이나 사상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미워하게 하지만, 사랑은 사람을 살리고 행복하게 하고 삶의 의미를 찾게 해준다. 그것이 사랑의 위대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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