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펌] 두 생명공학자의 명암

샌. 2005. 12. 8. 15:14

지금 우리나라에는 전 국민이 나서서 전대미문의 물질적·정신적 지지를 아낌없이 퍼붓는 황우석 박사와, 농민 집회의 와중에 목숨을 잃고 그렇게 거리에서 죽어간 앞선 수많은 이름들 중의 하나로 잊혀져 가는 전용철씨라는 두 사람의 ‘생명 공학자’들이 있다.


돌아간 전용철씨를 ‘생명 공학자’라고 부른 의도는 아이러니를 노린 것이 아니다. 인간이 죽은 물질로서 자연이 아니라 식물과 동물 등의 생명체를 자신의 기호와 욕망에 적절한 형태로 변형시켜 전유하기 시작한 것이 농업의 기원이라면, 농업도 첨단 장비와 초고급 인력이 투입되는 현대의 그것과 다름없는 ‘가장 오래된 생명공학’이라고 볼 필요가 있다. 농업은 결코 씨앗이라는 투입물에다 물리적 노동을 투하하여 일정 배수의 산출을 끌어내는 기계적인 행위가 아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 및 생명체 각자에 대해 또 그 삼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해 끝없이 관찰하고 그 위에서 개선과 개량을 끌어내는 고도의 정신노동도 들어간다. 사용하는 연구 방법론과 장비가 다를 뿐, 농민들을 마찬가지의 ‘생명 공학자’라고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중요한 차이가 있다. 원래 어떤 산업이건 오랜 시간이 지나면 기술혁신의 가속도가 점점 줄어들게 마련이며, 그래서 그를 통한 산출과 채산성은 시간축과의 관계에서 길게 늘어진 ‘S’자 곡선을 그리는 경향이 있다. 인류문명에서 가장 오래된 산업인 이 농업이라는 전통적인 ‘생명공학’은 이 S자 곡선의 오른쪽 정상에 도달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산출과 채산성의 여지를 극적으로 ‘회춘’시키기 위해 근본적으로 다른 생산방식으로 농업과 생명공학 전체가 재구조화되고 있는 것이 20세기 말 이후의 상황이며, 그리하여 다시 그 곡선의 왼쪽 아래에서 힘차게 위로 솟구치고 있다고 호언하는 여러 발명과 혁신들이 나타나고 있다. 전용철씨가 S자 곡선 오른쪽 위에 서 있는 이들 중 하나라면 황우석 박사는 그 왼쪽 아래에 서 있는 이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채산성’이라는 잣대를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수많은 전용철씨들이 그 곡선 위에서 떨어져 죽는 것에 눈감으면서 황우석 박사들에게 매달리고 있다.


그런데 제조업의 기술 발전을 다루는 S자 곡선 이론을 1차 산업인 농업에 단순하게 적용하는 사고는 무리가 있다. 순전히 채산성이라는 논리만으로 본다고 하여도 넓은 의미에서 생명산업이 노리는 궁극적인 부가가치의 원천은 18세기 이후 2차에 걸친 산업혁명과 달리 단순한 ‘물리적·화학적 생산량의 극대화’와 같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좋은 삶을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소위 ‘웰빙’이기 때문이다. 이 면에서 과연 유전자 조작이나 생명 복제에 근거한 최첨단 생명공학이 전통적인 농업에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는가는 실로 복잡한 문제일 것이다. 전통적 농업은 도시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또 기존의 생산방식을 어떻게 개량해갈 것인가 등에 따라 인간에게 최적의 ‘웰빙’을 가져다주는 고부가가치 산업이 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황우석 박사와 같은 분들의 노고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황우석 박사의 실험을 ‘국익’의 이름으로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지금 당장 아주 구체적으로 살 길이 막연해진 400만 농민의 이익은 무엇이고, 그것을 지키려다 죽어간 전용철 ‘생명 공학자’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지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한겨레 칼럼(2005. 12. 8) / 홍기빈(캐나다 요크대 박사과정·정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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