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느리고 어수룩한

샌. 2005. 5. 9. 13:11

정화조가 고장난 것이 한 달여 전인데 기사분이 그저께야 찾아왔습니다. 수리 요청한지 6주 만에 응답을 한 것입니다.그동안 똑 같은 말이 저와시공자 사이에 오갔습니다. "이번 토요일에도 사람이 안 나왔어요." "아, 그래요. 죄송합니다. 다음 번에는 꼭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런 말을 여섯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한 일이 끝난 것입니다.

 

저의 집을 지은Y건축회사 사장님은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늘 싱글벙글 웃으시면서 사업을 하시는 분 같지 않게 느릿느릿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사람이 좋다고 소문이 났는데, 단점이라면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화조 수리도 부탁한지 한 달이 지나서야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웃집의 경우는 1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해주지 않은 일도 있습니다.

 

그래도 밉지가 않습니다. 웃는 얼굴 앞에서는 성질을 낼 수가 없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결정적 약점이겠으나, 그 지역에서는 그래도 잘 나가는 건축 회사인 걸 보니 그걸 커버해 주는 뭔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단편적으로 느끼기에는 느린 행동 뒤에 숨어잇는 정직과 성실성이 아닌가 합니다. 고객이 그렇게 믿도록 만드는 것은 그분의 능력입니다. 상호간에 신뢰만 있다면 며칠 더 기다려주는 것은 결코못 참을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일본에서 열차가 탈선해서 100여 명이 사망하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일본답지 않은 사고에 모두가 놀랐는데, 사고 원인이 다음 역의 도착 시간에 맞추려는 과속 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일본에서는 예정 시간보다 10초만 늦어도 연착으로 간주되어 기관사가 견책을 받는다고 합니다.

 

정확한 것이 좋기는 하지만 지나친 효율성의 추구가 융통성을 앗아가고 인간미를 잃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규격화 되고 기계화된 체제에서 인간은 하나의 톱니바퀴의 역할밖에 하지 못합니다. 그런 질서 체계 안에서는 인간의 생명보다 우선시되는 가치가 존재할 것이 분명합니다.

 

대기업 가전 제품의 A/S를 요청할 때 느낀 것이지만 그신속 정확한 서비스 정신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처리 과정이 너무 완벽해서일까요,뭔가가 하나 부족한 듯한 느낌이 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따뜻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전에 기차를 타면 30분쯤 연착하는 것은 예사였습니다. 정시 도착을 한다면 희한하게 생각되는 때가 있었습니다. 문명 사회가 될수록 시간 개념이 정확해야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변화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잡한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를 않겠지요.

 

그러나 초 단위로 쪼개진 세상에서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고속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운전대를 잡고 가속기를 밟으면 제 자신 별 이유없이 폭력적이 되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아직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미세하게 쪼개진 시간이나 빠른 속도에는 적응을 하지 못하고 어지럼증을 느끼는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느리고 어수룩한 것이 그리워 집니다. 한 달여가 걸려서 해결된 정화조 수리를 보면서 화가 나기 보다는 어떤 향수 비슷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발전하는 문명 세계는느리고 어수룩한 사람은 가차없이 도태시켜 버릴 것입니다.

 

칼날같이 정확한 사람들보다는 좀 어수룩하게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싶습니다. 같이 느리고 어수룩하게, 그래서 마음이 편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다른 무엇을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참살이의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에 약을 치다  (0) 2005.05.23
작물 심기를 마치다  (0) 2005.05.16
새싹  (1) 2005.05.02
저 연초록 세상  (2) 2005.04.25
감자를 심다  (3) 2005.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