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도시에서 산다는 것

샌. 2014. 9. 28. 10:01

앞집이 이사 온 지 석 달이 넘었는데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다. 서로 현관문을 마주하고 있는데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그렇다고 벨을 누를 수도 없다. 현관 앞 복도에 아이들이 타는 자전거가 있는 걸로 봐서 초등학생 자녀를 둔 집인 것 같다.

 

아파트에서의 삶이 너무 삭막하다. 서로 간섭 안 하는 익명성이 편리하기도 하지만, 이럴 때는 여기가 사람 사는 동네가 맞나 싶다. 우리 아파트는 한 층에 네 가구가 사는데 입주한 지 4년이 되어 가지만 어느 집과도 정식으로 인사하지 못했다. 어쩌다 마주치면 어색한 눈웃음만 지을 뿐이다. 그나마 윗집과는 몇 번 오갔는데 슬프게도 소음 문제 때문이었다. 그래도 얼굴이 익다고 이젠 밖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불편했던 소음이 길을 열었다.

 

전에는 이사를 오면 가까이 있는 집에는 떡을 돌리며 안면을 텄다. 지금 돌아보니 굉장히 인간적인 관습이었다. 어느 때부터 떡 돌리는 풍습은 더 이상 도시에서 보기 어렵게 되었다. 목욕탕에서 서로 등의 때를 밀어주는 풍경이 사라진 것과 비슷한 때였다. 개인적이고 파편화 된 삶이 낳은 결과다.

 

앞집은 볼 때마다 늘 문이 닫혀 있다. 사람이 사는 집이 맞나 싶다. 멀리뛰기 정도의 거리밖에 안 떨어져 있는데 도대체 누가 사는지 모른다. 그냥 관심 끄고 살면 그만이지만 사람 사는 게 이래서 되겠느냐 싶어 한숨이 나온다. 사람과 접촉하길 좋아하지 않는 내가 봐도 이건 너무 하다 싶다. 같은 층에 사는 네 가구라도 서로 음식을 나눌 관계가 된다면 세상이 훨씬 더 따스해질 것 같다.

 

강제로 시행되었던 반상회라도 다시 부활했으면 좋겠다. 그때는 정책 홍보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비판을 했지만 이젠 새로운 차원의 반상회가 필요할 것 같다. 그렇게라도 해야 아파트 이웃간에 대화라도 틀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녁 시간에 가족이 모이기도 힘든데 이웃이 마음을 모아 같이 만난다는 것도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맞벌이 가정이 많으니 저녁이 되어도 불 꺼진 집이 반 이상인 게 현실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너무 가까워도 문제, 너무 멀어도 문제다. 적당한 간격이 중요하다. 그러나 도시의 아파트는 멀어도 너무 멀다. 물리적으로는 가까운 공간에 살지만, 정서적으로는 외국인만큼 멀고 생소하다. 아예 대화 자체가 차단되어 있다. 층간 소음 문제도 이런 거리감에서 비롯되는 게 많다.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라면 충분히 이해하며 조심할 것이고, 문제의 많은 부분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도시 생활 자체가 붙박이가 아니고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이웃에 대한 관심이 적다. 전세라면 2년만 살고 가면 되니 깊게 사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파트라는 폐쇄적인 공간 구조만 아니라 이런 도시인의 떠돌이 삶도 이웃간의 단절에 한몫을 한다. 옆집이 이사 갔는지 왔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문에서 엉뚱한 사람이 나오는 걸 보고 무슨 변화가 있었구나, 알아차린다.

 

조선 시대 사람이 우리를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물질의 풍요보다 관계의 빈곤에 오히려 더 놀랄지 모른다. 기술의 발달로 지구는 한 마을이 되었지만 정작 가까이 있는 이웃과는 차단되어 있다. 옆에 있는 사람은 놔두고 멀리 있는 사람과는 기계를 토닥거리며 재잘거린다. 먼 것은 가까워졌지만, 반대로 가까운 것은 멀어졌다. 이러다가는 가족 사이도 원자화되어 서로 남남으로 살지도 모른다. 가상 현실이 실제의 삶을 대치하게 될 디스토피아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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