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늙은 학자가 요양을 하기 위해 작은 시골마을로 이사를 왔다. 노인은 주위가 고요한 이 마을이 썩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마을 아이들이 집 주위에서 큰 소리로 떠들며 놀기 시작했다. 노인은 아이들 소리 때문에 낮잠조차 편안히 잘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나가서 조용히 하라고 타일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이 동네 아이들을 집에 초대했다. 노인은 용돈을 가지고 나와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부터 내 앞에서 고함을 질러주지 않겠니? 소리가 큰 아이에게는 더 많은 용돈을 주마.”
아이들은 신이 나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댔다. 노인은 약속한대로 소리의 크기에 따라 아이들에게 용돈을 나누어주었다. 그렇게 3주가 지나가는 동안 아이들은 고함을 지르고 용돈을 받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런데 3주가 지난 후부터 용돈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몇몇 아이들이 항의를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노인을 위해 고함을 질러주었다. 적은 돈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주일이 더 지나자 노인이 더 이상 용돈을 주지 못하겠다고 선포했다. 아이들은 힘껏 고함을 질러보였지만 단 한 푼의 용돈도 받을 수 없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며 화를 냈다. “다시는 저 영감에게 고함을 질러주나 봐라! 우리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톡톡히 알게 될 거야.”
그날 이후, 아이들은 노인 집 근처에서 다시는 놀지 않았으며, 집 근처를 지나갈 때면 말소리를 줄였다. 아이들 나름대로의 복수였다. 사실 노인은 사회심리학의 ‘과잉정당화 효과’ 심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심리학의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본 내용이다. 요사이 아파트 층간소음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보니 노인의 지혜가 인상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다행히 아내가 윗집에 찾아가 우리 상황을 말하고 이해를 구한 뒤로는 소음이 많이 줄어들었다. 이 정도면 그런대로 지낼 만하다. 윗집에서도 애쓰는 노력이 보이니 어지간한 것은 참을 만하다. 소음은 소음 자체라기보다는 상호간 이해의 문제인 것 같다. 신영복 선생이 말한 대로 층간 소음에서 벗어나려면 이웃을 아는 사람으로 만들라는 게 일리 있다. 아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 자식이나 손자가 뛰는 발자국소리가 귀에 거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관리소에도 항의 전화를 했다. 아마 우리 같은 집들이 여럿일 것이다. 얼마 전에는 아파트 게시판에 관리소장 명의로 층간소음을 조심해 달라는 공고문이 붙었다. 그런데 해결 방법이라고 적은 글이 재미있다.
- 바로 위층이 범인이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아래층에서 느끼는 소음은 바로 위층, 위층 양옆, 한 칸 더 위층 어딘가에서 나는 소리일 수 있습니다.
- 아래층 입주민: 피할 수 없으면 즐기십시오.
아이들 뛰노는 소리는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는 징조라고 생각하시고 피아노 소리는 음악 감상의 기회로 삼으시고 즐기시면 어느 순간 소음이 들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 위층 입주민: 아래층에 미안한 마음의 텔레파시를 전송하십시오.
위층에서 미안한 마음의 텔레파시가 계속 전달되다 보면 아래층에서는 어느새 본인도 모르게 고마운 마음의 텔레파시를 전송하고 있음을 느끼실 것이고 화합의 텔레파시가 전송되는 순간이 지속될수록 살기 좋은 아파트 문화가 꽃피워질 것입니다.
- 아무리 화가 나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넘지 마십시오.
층간소음 문제로 인한 끔찍한 일이 아파트 내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언론을 통해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참을 인을 가슴에 새겨두고 갈등을 부드럽고 차근차근 풀어나가신다면 넘어야 할 선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은 해결 방법이 없다는 얘기를 에둘러 표현했다. 처음에는 이 글을 읽고 화가 났다. 참고 사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니 피해자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것도 정도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죽했으면 텔레파시까지 들먹였을까를 생각하니 관리소 측의 처지도 이해가 갔다. 지금과 같은 건축 조건에서는 서로 조심하고 참으며 살 수밖에 도리가 없는 일이다.
여기는 젊은 세대가 많다. 대부분이 유치원, 초등학생 아이들을 둔 가정이다. 그러니 늘 아이들로 북적댄다. 우리는 외딴 섬인데 이젠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활기가 느껴져 좋을 때도 있다. 앞 상가 건물에 들어선 태권도 학원의 기합소리도 이젠 흘려들을 정도까지 되었다. 어디서도 살게 되어 있는가 보다. 이곳에 올 때는 절간 같이 조용하길 바랐는데 정반대로 되어 버렸다. 대신에 생동하는 활력이 있다. 내가 만약 아이를 키우고 있다면, 이라고 역시사지로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넓어진다. 과거에는 나도 알게 모르게 이웃에 피해를 많이 주었을 것이다. 아직도 이사 갈 여지를 남겨두고는 있지만 처음과 달리 지금은 소음을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밤늦게 소음이 들리면 라디오를 켜놓고 잠잠해지길 기다린다. 덕분에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두 시간 정도는 늦어졌다.
새 집에 들어와서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이 지내고 있다. 소음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는데 지금은 벌레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건설 회사 쪽에서는 근본적 대책 없이 마이동풍이다. 언제쯤 되어야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잎은 조용히 있으려 하는데 바람이 가만 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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