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사기[37]

샌. 2025. 2. 9. 10:38

패공은 고양의 객사에 이르자 사람을 보내 역생을 불렀다. 역생이 객사에 이르러 패공을 만나러 들어갔을 때, 패공은 마침 침상에 걸터앉은 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게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으로 역생을 만났다. 역생은 들어가서 길게 읍한 뒤 절을 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은 진나라를 도와 제후들을 치려고 하십니까? 아니면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치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패공은 역생을 욕하며 꾸짖었다.

"이 유생 놈아! 천하 사람들이 한결같이 오랫동안 진나라에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제후들이 서로 손을 잡고 진나라를 치려 하고 있는데, 어째서 진나라를 도와 다른 제후들을 친다는 말을 하느냐?"

역생이 말했다.

"진실로 사람들을 모으고 의병들을 합쳐서 무도한 진나라를 쳐 없애고자 하신다면 거만한 태도로 장자를 만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패공은 발 씻던 곳을 그만두고 일어나 의관을 바로 하고 역생을 상석에 앉힌 뒤 사과했다.

 

- 사기(史記) 37,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

 

 

이 편은 유방의 참모였던 역생, 육가, 주건 세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중에서 역생은 고양에서 말단 벼슬아치로 지내던 가난한 유생(儒生)이었다. 유방(패공)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역생은 지인을 통해 유방과 만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유방은 오만하여 사람들을 함부로 대했는데, 특히 유생을 싫어하여 그들의 관에 소변을 눌 정도였다. 무명의 유생이 자신을 만나자고 하니 마땅찮았을 것이다.

 

역생이 들어갔을 때 유방은 두 여자의 시중을 받으며 발을 씻고 있었다. 아마 역생을 발의 때만큼이나 하찮게 여겼을 것이다. 역생은 유방이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른다고 꾸짖었었으니, 역생의 담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천하를 제패할 꿈을 가지고 있다면 인재를 대우하고 존경할 줄 알아야 한다는 직설이었다.

 

주목할 것은 유방의 태도다. 유방은 바로 발 씻던 것을 중단하고 일어나 의관을 바로 하면서 역생을 상석에 앉히고 천하를 경영하는 계책을 물었다. 자신의 잘못을 알아채고 빠르게 뉘우친 것이다. 양약고구(良藥苦口)라고 바른말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다. 그런다고 내치지 않고 유방은 직언을 하는 인재들을 자기 옆에 두었다. 누구처럼 입틀막을 하거나 아첨꾼만 들이지 않았다. 이런 데서 천하를 경영할 수 있느냐 아니냐가 갈라진다. 

 

역생은 유방의 참모가 되어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담력과 말솜씨로 무력을 쓰지 않고 제나라를 평정하고, 두 차례나 남월에 사신으로 가서 한나라를 섬기도록 설득했다. 인사만사(人事萬事)라는 말이 있다. 어리석은 지도자에 의해 대한민국이 이토록 혼란에 빠진 원인도 결국 그것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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