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새벽에 깰 때가 있다. 새벽이라야 6시쯤이지만 보통 때보다는 한두 시간 일찍 눈을 뜨는 셈이다. 이불속에서 빈둥거리기도 하고 부지런을 떨며 책을 펼칠 때도 있다. 오늘은 김봄 작가의 에세이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를 읽었다. 이런 시간에는 무거운 주제보다는 가벼운 에세이가 적당하다.
우선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이 맘에 들었다. 일상의 에피소드를 가벼운 터치로 유머러스하게 잘 그려냈다.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부모와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한 갈등도 여럿 나온다. 심각한 것을 심각하지 않게 대처하고 쓰는 것이 작가의 재주인 것 같다.
작가는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산다. 여행이나 출장을 갈 때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결혼하지 않은 작가는 정치적으로 좌파이고 부모는 우파다. 사사건건 부딪칠 여지는 많다. 갈등을 지혜롭게 처신해서 이해와 화해로 결말짓는 작가의 태도는 배울 만하다.
작가는 글을 쓸 때 진정성을 강조한다. 진심이 담긴 글만이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쾌하고 통통 튀는 글이지만 속에는 페이소스가 깔려 있다. 작가는 어머니를 '손 여사'를 지칭하며 모녀 사이의 애증 관계를 솔직하게 보여준다(후기에서는 가족 이야기라 사실대로 드러내지 못한 면이 있다고 했지만). 그중 한 편을 옮겨본다.
빨래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세탁기가 없었다. 어린 자식이 다섯이나 있는 집에 세탁기가 없다니! 여름이야 그냥저냥 지나갈 수 있다손 치더라도 겨울에는 그 빨래를 감당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손 여사는 빨간 대야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앉아 빨래판을 대야에 걸치고 두 손을 비벼가며 빨래를 했다. 공해는 지금이 더 심한 것 같은데 그때는 왜 그렇게 옷에 때가 많이 묻었는지 모르겠다. 손 여사는 소매 끝에 맺힌 때를 비벼대느라 애가 닳았다.
애가 닳으면 자연히 손 여사의 말이 거칠어졌다. 아버지를 씹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버지의 가족들을 입에 올렸다. 손 여사는 방 안에 숨죽이고 들어앉은 우리가 기가 죽든 말든, 계속 치열하게 빨래를 해댔다.
나 외의 것에 무관심했던 나와 달리 나의 형제들은 언제나 주눅이 들어 뭔가를 하는 척했다. 누가 보아도 손 여사의 말 이외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손에 책을 붙들고 있어야만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형제들이 책을 펼쳐놓고 눈치를 살피든 말든, 손 여사가 뱃속에서 올라온 목소리로 아버지 흉을 보든 말든, 나는 내 할 일을 했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방바닥을 뒹굴면서 공상을 했다. 오 남매 중에 오직 나만이 뭔가를 하고 있었기에 나는 뭔가를 하고 있는 척하는 형제들보다 당당할 수 있었다.
수전노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이어지다 땔감이 떨어지면 손 여사는 방 안에 들어앉은 우리 형제들을 곱씹었다. 앞으로 잘하라고 하면 그런 말을 거역할 배짱이 있는 형제들도 아니었는데 손 여사는 사납게 말을 했다. 물론 그 말은 우리의 눈이나 얼굴을 마주한 것이 아니었다. 허공을 향한 것이었다. 화를 돋워서 팔의 근육에 기운을 북돋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말은 내 언니들의 가슴을, 내 동생들의 배를 싸륵싸륵 아프게 만들었다.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 빼곡히 우리 일곱 가족의 빨래가 걸리면 손 여사는 고봉밥을 먹고 길게 낮잠을 잤다.
젊은 손 여사가 작정하고 한풀이를 할 수 있었던 건 그런 노동의 순간뿐이었다.
그렇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어 젊고 곱던 손 여사에게 너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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