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남이 봐도 되는 일기

샌. 2018. 12. 12. 16:25

 

1.

찬바람 속을 걸으면 눈물이 쉴 새 없이 나온다. 손수건 꺼내는 걸 잠깐 잊으면 볼을 타고 목까지 흘러내린다. 내가 이렇게 눈물 많은 사람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그런데 정작 울어야 할 때는 절대로 안 나온다.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 주책이다. 병원에 가보고 싶지만 의사는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노화 현상입니다!" 미세먼지를 막아주는 마스크처럼 눈물을 제어해 주는 투명 마스크는 없을까. 고령화 시대에 대박 상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2.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 천년의 세월을 살 것처럼 앞만 보고 살아왔는데.... 그렇게 멀리만 보이던 노년이었는데 세월을 나를 어느덧 노년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초등 친구 카톡방에 올라온 내용이다. 연말이어선지 이런 회한조의 글이 자주 올라온다. '어느새 한 장 남은 달력을 쳐다보며' 같은 것 말고 새로운 레퍼토리는 없을까. "한 해가 가니 좋네요. 점점 잘 익어가는 당신, 축하해요."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고?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늙어가는 건 자연 현상일진대 추하게 보이는 건 인간밖에 없다. 길섶에서 저 혼자 잘 익어가는 열매를 보며 부끄러워지지 않는가.

 

3.

장염이 찾아와서 죽으로 연명하고 있는지 사흘째다. 좋아하는 커피도 못 마시고 과일도 삼가고 있다. 죽은 아무리 먹어도 금방 배가 고파진다. 속이 허하니 짜증이 잘 난다. 오래전에 단식을 해 본 적이 있었는데 사흘 만에 두 손 들었다. 곱창에 소주 생각이 간절한데, 안 되니 화풀이를 가족에게 한다. 수양이 안 되어 있으면 단식도 어렵다. 오늘은 아내 몰래 커피를 타서 내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들키면 잔소리를 왕창 들어야 한다. 숨어 마시는 커피가 훨씬 더 맛있다.

 

4.

어제는 눈발이 날리더니 오늘은 맑은 하늘에 낮 기온은 영상으로 올라갔다. 장 운동을 시킬 겸 도서관 나들이에 나섰다. 유리로 된 현관문을 밀고 들어서는데, 맞은편에서 젊은이가 오기에 문을 잡고 있어 줬다. 젊은이는 "고맙습니다"라며 감사 인사를 한다. 사소한 것이라 그냥 갈 수도 있는데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것이 일상의 작은 행복이리라. 다정한 말씨, 작은 친절이 사회를 밝게 한다. 그런데 말이다, 한 지붕 아래 사는 사람에게는 그게 잘 안 된다. 묘한 일이다.

 

5.

도서관에서는 책을 두 권 빌렸다. <중세의 사람들>과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이다. 노년에는 일이 필요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독서도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인데, 책 읽는 걸 일한다고 하기에는 민망하다. 나는 잠정적으로 결론을 낸다. 독서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노년에 일이 없어도 인생을 즐길 수 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일 콤플렉스에서 해방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노년의 출발이다.

 

6.

경안천을 한 시간 정도 산책했다. 천변에는 갈대와 억새가 많다. 똑딱이를 꺼내 찍어본다. 갈대를 멋지게 찍는 사람이라면 사진 실력을 인정해도 된다. 갈대는 감당하기 힘든 모델이다. 바람이 불면 머리를 풀어헤친 미치광이가 된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는 사실 무시무시한 말이다. 산책로에서 한 노인네를 만났다. 말대꾸를 해 줬더니 신나서 정부와 대통령 욕을 한다. 앞으로 철도 연결이 되면 돈 보따리가 북으로 실려 간단다. "형이 가난한 동생 좀 도와주면 안 되나요?" "동생은 무슨,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지." 내가 너무 순진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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