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그는 우리 욕망의 대부분이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 타자의 욕망이라고 냉정하게 진단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 시대에 자본만큼 강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타자도 없을 것입니다. 진정 무서운 일이 아닌가요? 자본은 마치 몸에 기생하는 암세포처럼 우리 내면의 욕망을 먹이삼아 번식하고 있습니다. 우리 욕망이 치열해질수록, 자본은 더욱 강해질 테고 우리 삶은 점차 병들어가겠지요. 자본이 남긴 뿌리 깊은 상처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시급한 것은 우리가 상처 받고 병들어 있다는 사실에 직면할 용기를 갖추는 일이 아닐까요? 숨겨진 상처를 상처 그대로 직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도 치유의 희망이 피어나리라 믿습니다."
철학자 강신주 선생이 <상처받지 않을 권리>의 서문에서 한 말이다. 여기서는 자본주의 체제의 생존 비밀을 '욕망의 집어등'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심해의 오징어들은 오징어잡이 배에 매달린 수많은 집어등의 치명적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징어는 화려한 불빛에 끌려가면서도 자기가 가는 길이 죽음의 함정일 줄은 모른다.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우리 신세도 마찬가지다.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연구한 여덟 사람의 문학가와 사상가를 소개한다. 이상, 보들레르, 유하, 투르니에, 짐멜, 벤야민, 보드리야르, 부르디외다. 이들이 느끼거나 탐구한 이론을 통해 자본주의의 실상이 드러난다. 자본주의적 삶에 친숙해진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내용으로 가득하다.
다양한 내용 중에서 '인간이란 허영을 가진 존재'라는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부르디외의 사상이 관심을 끈다. 보통 인간 본성이 선하고 이성적이라고 하는데, 이런 표현조차 인간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런 인간의 허영심이란 욕망을 교묘히 이용하여 소비 사회를 만들어나간다.
인간의 '구별짓기'도 허영심을 떠나 설명할 수 없다. 상류계급의 미적 취향이 대표적이다. 비싼 명품을 선호하는 것은 하류계급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물품이기 때문이다. 명품을 구입하면서 상류계급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은 자신들이 하류계급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분명히 입증하는 것이다. 하류계급은 상류계급을 모방하면서 선망의 대상이 되려고 한다.
자본주의는 이런 구별짓기의 욕망 혹은 허영의 심리를 정확히 읽는다. 자본주의의 발달의 핵심에 기술 개발에 따른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부추기는 유혹적인 소비사회의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 산업화에 따른 부의 축적, 성생활의 자유로움, 계급의 탄생, 향락 중심지로서 대도시의 발달 등이 결합하면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사치'가 등장하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길들이고 자극하여 끝없이 상품을 소비하게 만든다. 그 결과 노동으로 얻은 화폐는 소비되고, 다시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소비와 노동이라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면서, 대신 자본주의는 번영하고 발전한다. 인간 본성으로서의 허영심은 자본주의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에서 자유란 소비의 자유며 돈의 자유에 불과하다. 돈이 있으면 명랑하고, 돈이 없으면 우울해진다는 것은 자본이 우리의 욕망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는 징표다. 소비사회의 소비자들은 자기과시의 치열한 소비 경쟁에 빠져든다. 그 결과 우리는 연대의 전망을 잃고 고립된 개인들로 산산이 분해되고 만다. 나아가 한 개인의 통일성마저도 분해되는 일이 벌어진다. 우리는 진정한 삶의 자유를 빼앗기고, 그 대가로 소비의 자유라는 치명적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간다.
이 책의 부제는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다. 자본주의적 삶에서 오는 상처의 '진단'이 목적이다. 상처를 알고 제대로 느껴야 치유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과제는 각자에게 남겨진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