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일이 납덩이를 안고 있는 듯 무거울 때 꺼내 보는 책이다. 아무 데나 펼쳐 읽어도 답답한 가슴이 풀어진다. 인생이란 무거운 것도 가벼운 것도 아니다. 살아가는 사람이 만들어낸 관념이며 망상일 뿐이다. 누가 납덩이를 들고 있으라 한 적이 없다. 한두 꼭지만 읽어도 글쓴이의 생활 속 유쾌한 인생 철학이 나에게로 번져온다.
전체 제목은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이다. 글쓴이는 생활 속의 철학자요, 세계 동포주의자를 자처하는 전시륜(1932~1998) 선생이다. 서울공대 재학 6.25로 학업을 중단하고 도미해서 철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이후 미국에서 직장 생활과 글쓰기를 하며 살았던 분이다. 선생이 모국어로 쓴 유일한 책이 이 <유쾌한 행복론>이다.
"사람은 왜 사냐? 살라고 태어났기 때문에 산다. 어떻게 살면 좋을까? 행복하게 살면 된다." 이것이 선생의 인생 철학이다. 근원을 올라가면 그리스의 에피쿠로스학파에 닿을 것 같다. 폭넓은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삶을 풀어낸 글은 맛깔스럽고 유머러스하다. 선생은 통념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자유인이다. 괴짜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선생은 군대에서 하사관으로 있던 1950년대에 신문에 구혼 광고를 실었다. 당시 시대를 생각하면 얼마나 파격적이겠는가. 모 잡지에서 군인을 비하하는 글을 보고 당장 반박문을 보냈는데, 그 인연으로 아내를 만나기도 했다. 미국에 있을 때도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유쾌하면서 용기 있고, 낭만적이면서 화끈한 분이다.
삶에 만족하는 것은 특별한 게 아니다. "평범한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아량은 없지만 남을 미워하지 않고 살 수 있고, 하루에 밥 세 끼를 먹을 수 있으면 고마움을 느끼고, 가끔 뜨거운 목욕탕에 들어가면 천당에 온 즐거움을 느낀다." 그런 일상이 행복의 원천이다. 결국 행복도 자기 선택이 아닐까.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만족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하다고 불평한다.
'허영과 감사'라는 글의 뒷부분이다. 홍콩에 출장을 갔을 때 공항에서 호텔까지 택시를 탔는데 잠깐 한 눈 돌린 사이에 기사가 미터기를 돌려 요금 조작하는 걸 봤다. 허름한 기사의 옷차림에 마음이 약해진 선생은 신고하는 대신 기사가 요구한 30달러를 지불했다는 이야기가 앞에 나온다.
... 얼마 후 나는 워싱턴의 한 한국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좌석에서 청춘 남녀 한국인 한 쌍이 저녁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그들은 끊임없이 킬킬 웃어대고, 서로 손도 만지고 허리를 끌어당기며, 가끔 키스까지 했다.
나에게는 매우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자랄 때 연애를 해 보지 못했다. 하긴 그 당시 연애를 해 본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환경 보호를 해야 된다는 핑계로 사회가 연애를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미국에 와서야 처음으로 미국 여자와 연애다운 연애를 할 수 있었다. 한국의 청춘 남녀가 저렇게 열렬하게 사랑하는 장면을 보자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식당 주인을 불러 젊은 애인들의 밥값을 치르고 서둘러서 나와 버렸다. 내가 못 해 본 연애를 남들이 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나와 버린 것이 아니었다. 멋진 연극 공연에 대한 표값을 낸 것뿐이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자문(自問)했다. 나는 왜 생판 모르는 사람의 저녁값을 치렀는가? 나는 왜 홍콩에서 정직하지 못한 운전사에게 30달러나 희사했는가? 나는 세상을 건지겠다, 남에게 자비심을 베풀어주겠다는 의욕이 전혀 없다. 그러면서도 나는 왜 그런 엉뚱한 짓을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의 소행은 내가 나의 허영심을 간질어서 즐거움을 얻어 보자는 간사한 짓이었다. 따져 보니까 밑진 흥정은 아니었다.
나는 50달러 이상의 기쁨을 느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란 태어나서 밥먹고 똥싸고 새끼치고 허덕이다가 죽는 싱거운 동물이다. 잘났다는 사람도 알고 보면 그 놈이 그 놈이고, 그 년이 그 년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다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다.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말마따나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삶이란 조용한 절망이다.
어쩌면 삶은 권태의 늪이다. 이 절망, 이 권태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허영심이란 미덕(美德)을 심어 주셨다. 내가 남보다 못난 것이 하나도 없다는 허영심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고 행복감을 준다. 허영심은 삶에 의미를 주고 삶을 신나게 만든다. 허영은 대중의 미덕이고 민주주의 시대의 미덕이다. 진, 선, 미는 귀족적인 미덕으로서 진을 찾고 선을 베풀고 미를 얻기는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들다. 그러나 허영은 기르기 쉽고 쓰기 쉽고 남을 해치지 않는 미덕이다.
잘 났다는 정치가, 실업가, 운동 선수들도 남이 망해야 만족스러워한다. 비돌(Gore Vidal)의 말처럼 그들은 성공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고 남이 망해야만 기쁨을 느낀다. 허영이란 거울을 들여다 보고 눈썹을 그리는 즐거움, 단체 사진을 볼 때 내 얼굴을 제일 먼저 보는 즐거움, 청객이 없는 데서 콧노래를 부르는 즐거움, 하이힐을 신고 궁둥이를 요란하게 흔들어 보는 즐거움이다. 비교적 순진하고 무해하고 경제적인 미덕이다. 이런 점에서 허영은 인간 정복에 가장 중요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에 다닐 때 캐롤이란 여학생을 안 적이 있다. 이 애는 시간만 나면 오락실에서 친구들과 브리지(Bridge)를 하는 것이 일이었다. 정말 얼굴이 깜찍하게 생긴 미녀였다. 항상 카드 놀이를 하는데 시험만 치면 점수를 잘 얻는다고 했다. 그런데 여러 학생들이 그녀가 건방지고 잘난 체한다고 해서 싫어했다. 언젠가 단둘이서 교정을 걸으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항상 놀자 주의인데 어떻게 시험을 칠 때마다 백 점을 땁니까? 커닝을 조금 하는 게 아닌지요?"
그녀는 깔깔 웃으면서 자기는 머리가 좋아서 시험을 치면 으레 점수를 잘 받는다고 했다. 그녀는 덧붙였다.
"그런데 나를 싫어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겸손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죠. 내 머리가 좋은 것은 내가 노력해서가 아니라 나의 부모가 머리 좋은 진(Gene)을 물려주었기 때문이죠. 나는 사실을 얘기했을 뿐이에요. 진리를 말하는 것이 죄입니까? 내가 나 자신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님을 칭송했는데 그들은 나보고 건방지다, 허영심이 많다, 겸손하지 못하다고 욕을 하고 있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겸손하다는 친구들의 대부분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고도 자기는 가난해서 죽만 먹고 자랐다고 하면, 사람들은 아 그 사람 참 겸손하다고 칭찬을 합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를 해서 시험 점수를 잘 땄을 때 어깨를 움츠리고 씩 웃으면서 운이 좋아서 점수를 잘 받았다고 하면, 얼빠진 자식들은 겸손하다고 하겠죠. 그렇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는 재주를 타고나지 못했습니다. 물론 많은 겸손한 정치가들, 겸손한 목사들이 없었더라면 이 세상은 이토록 요지경 속으로 빠져 들지 않았을 겁니다. 저 참 건방진 계집애죠?"
그녀는 미소를 띠며 힐끗 내 얼굴을 훑어보고 내 손을 꽉 쥐었다. 나는 산상수훈을 받고 박달나무 밑에서 계시라도 받은 듯 강력한 쇼크를 느꼈다. 환희의 쇼크, 이해의 쇼크였다.
스피노자는 겸손은 위선이기 때문에 미덕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좀 덜 겸손하고 살짝 더 허영을 키워 보는 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음식 소화를 잘 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은 2001년 출판사 '명상'에서 나온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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