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배추는 다섯 번 죽는다

샌. 2010. 11. 2. 10:02

김장철이 다가왔다. 올해는 배추 파동을 겪은 뒤라 김장을 하는 느낌이 여느 해와는 다를 것 같다. 배추 한 포기에 15,000원이나 한 적도 있었으니 그때는 김장을 못하는 줄 알고 걱정한 사람도 많았다. 할인을 해도 1만원이 넘는 배추였는데 어느 가게 앞에서는 다섯 시간이나 줄을 서기도 했다. 지나치게 야단법석을 떨기도 있지만 한국 사람에게 김치는 쌀 만큼이나 소중한 그 무엇임을 그때에 알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계시니까 나는 농작물 가격에 둔감한 편이다. 쌀을 비롯해서 여러 작물을 가져다 먹고 있으니 시장가격은 우리와는 별 관계가 없다. 오히려 농산물 가격이 올라서 농민들 형편이 나아졌으면 하고 바란다. 가격 문제는 유통구조 등 복잡한 요인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정부의 정책이 농민을 푸대접한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농업을 죽여 다른 산업을 살리겠다는 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농촌의 황폐화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농촌을 생각할수록 안타깝다.


고향 밭에는 어머니가 가꾼 배추가 잘 자라고 있다. 올해도 형제들이 모여 같이 김장을 담글 것 같다. 김장하는 날은 잔칫날과 비슷하다. 다섯 집이 모여 함께 하다 보니 각자 역할 분담이 되어 있다. 나는 주류에 끼지 못하고 김치통을 날라주는 것 같은 잔심부름을 주로 한다. 어디 가나 비주류 역할이다. 짜네, 싱겁네, 속이 많이 들어가네, 아니네, 하며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한다. 함께 일하는 즐거움은 옆에서 보아도 흐뭇하다. 같이 만든 먹을거리를 나누는 것은 가족의 유대감을 더욱 강하게 한다.


김치가 제 맛을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땅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또 한 번 죽고, 소금에 절여지면서 다시 죽고,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이 돼서 또 죽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 다시 한 번 죽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김치 맛을 낸다는 것이다. 요사이는 장독 대신 김치냉장고라고 해야겠지만....


배추가 이럴진대 하물며 사람인 경우야 어떻겠는가. 향기 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수없이 죽어야 한다. 내 성질, 내 고집, 내 주장을 죽이지 않고서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을 보면 늙어갈수록 도리어 더욱 뻣뻣해진다. 가장 경계해야 될 일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나 세계관이 화석처럼 굳어져 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변화할 줄도 모른다. 풋내 나는 겉절이를 닮았다. 따스하게 살아있는 것은 말랑말랑한 법이다.


인생은 자아가 죽는 과정이다. 그것이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나를 버릴수록 향내 나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인간의 본성은 자아를 강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극기는 항상 고통을 수반한다. 그 뒤에야 마음이 소란하지 않고 잠잠해지는 경지가 찾아온다. 그걸 ‘소강’(小康)이라 한다고 마침 사무실로 찾아온 H가 말해주었다.


농익은 김치처럼 숙성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소금과 하나 되어 절여지고, 매운 고춧가루와 젓갈과도 한 몸이 되는 걸 감내해야 한다. 인간은 고통과 고뇌를 통해 자아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과 고뇌의 의미가 거기에 있다. 이것이 김장철에 김치에서 배우는 지혜다.


'참살이의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대로 함께  (0) 2010.11.23
탐욕의 세계를 바꾸자  (0) 2010.11.06
행복전도사의 자살  (1) 2010.10.11
과잉과 결핍  (2) 2010.10.06
인연  (4) 2010.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