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인연

샌. 2010. 10. 1. 11:03

쉽게 체념하게 된다. 좋게 말하면 너그러워진다. 나이를 먹을수록 생기는 변화다. 오래 살게 되면 궂은일들을 많이 겪어서인지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다. 감각이 무뎌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과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 때문에 애간장을 태우는 일도 줄어든다.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예전에는 어떤 식으로든 맺어지려고 안절부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편하게 생각한다.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인연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고민하고 애 쓴다고 안 될 일이 되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만사의 변화를 인연으로 읽으려 한다.


살면서 경험하는 사건들이 우연으로 일어나는 것인지, 인연으로 생기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연으로 생각하든 인연으로 믿든 각자의 자유다. 그런데 젊었을 때는 우연 쪽에 비중을 뒀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연 쪽으로 추가 기운다.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세상 존재들 사이에는 어떤 신비한 연결망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당구알처럼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큰 유기체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신비한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인연은 그런 관점에서 우주를 보는 것이다.


인연에는 선연(善緣)도 있고 악연(惡緣)도 있다. 누구나 선연을 맺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인연 자체에 선이나 악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의 호오에 따라 선연과 악연으로 나눌 뿐이다. 둘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선연인 줄 알았는데 악연으로 드러나고, 악연인 줄 알았는데 선연으로 변하기도 한다. 선과 악은 인간이 반응하는 양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선과 악이 문제가 아니라 어느 하나에 집착함이 갈등을 낳는다고 할 수 있다.


여주 밤골 생활 7년은 그런 인연의 변덕을 체험한 기간이었다. 처음에 밤골은 하늘이 내려준 복지(福地)였다. 마치 나를 위해 숨겨놓았던 장소 같았다. 그런데 호사다마가 빈 말이 아니었다. 뜻하지 않은 악연이 생기면서 먹구름이 몰려왔다. 꿈은 꺾이기 시작했다. 악연은 밤골에서 철수하는 마지막 날까지 괴롭히더니 많은 인간관계가 파탄이 났다. 그곳을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3년이 지난 지금 다시 경위서를 써야하는 처지가 되었다.


많이 답답하다. 밤골과의 인연을 언제쯤 되어야 털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의지대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악연도 인연이라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악연이 선연으로 바뀔지 모르는 일이다. 밤골을 생각하면 천당에서 지옥으로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다. 지금에 와서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만 이번 일의 사실 관계에 대해서만은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 어찌 되었든 밤골과의 인연은 무척 끈질기다. 전생에 그곳과 무슨 연을 그다지도 깊게 맺었는지 모르겠다.



<경위서 >


제가 여주에 땅을 구입하고 살았던 그간의 경위에 대해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농촌에서 나서 중학교 때까지 자란 사람으로서 서울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있지만 늘 귀농을 동경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바람은 점점 커졌습니다. 마침 1999년 겨울에 여주 밤골에 있는 수녀원에 피정을 들어가게 되었지요. 일주일간 수녀원에 있으면서 산책하는 길에 둘러본 그 마을의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고, 노후의 삶터로 적당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수녀님의 소개로 교우의 밭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여주군청으로부터는 서울에 직장이 있어도 충분히 자경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교사라는 직업이 시간 여유가 많고 방학이라는 긴 휴가가 있는 장점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컨테이너를 개조한 주택에서 지냈습니다. 전기를 들여서 취사와 취침 등 보통의 일상생활이 가능했습니다. 서울 직장까지는 거리가 80 km이었고, 약 1시간 2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항상 여주에서 출퇴근한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도록 노력했습니다. 당시의 열정으로는 여주를 다니는 게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니었습니다. 학교에는 사정을 말하고 담임 등 다른 업무는 맡지 않았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였지만 방과 후나 방학 때의 보충수업도 하지 않고 여주 생활에 빠졌습니다. 서울에서의 인간관계도 많이 끊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수근 거릴 정도였습니다.


밭작물은 힘이 적게 드는 옥수수나 고구마를 많이 심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채소들도 조금씩은 다 가꾸었습니다. 어느 해에는 그 종류가 20종이 넘기도 했습니다. 힘들기보다는 재미있었습니다. 직접 땀을 흘려 내가 기른 작물을 먹는다는 사실이 또한 굉장히 보람 있었습니다. 작물 재배는 저와 아내 두 사람이 직접 했습니다. 동네 주민한테서는 씨앗을 얻는다거나 농사에 대한 조언을 가끔 들었으나 물리적인 도움은 없었습니다. 물론 대리경작도 전혀 없었습니다. 모종이나 비료, 퇴비 등은 여주와 양평 시장, 그리고 두 지역의 농협을 주로 이용했습니다.


귀농에 대한 확신이 워낙 커서 서울에 있던 아파트도 처분했습니다. 당시에 집의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서울에는 전셋집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여주에는 농가주택을 지었습니다. 2003년도의 일입니다. 귀농을 결심했으므로 제 주민등록도 옮겼습니다. 집을 지으면서 생활의 중심이 더욱 여주로 기울었습니다. 2004년도에는 직장을 여주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기려고 경기도로 전출을 신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퇴직까지도 생각했지만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습니다. 아내는 주로 주말에 내려와 일을 거들었습니다. 둘의 손으로 300여 평 되는 밭작물 가꾸기는 큰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동네 주민들은 늘 일하는 저희들을 보고 무척 안쓰럽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여주에서의 생활을 통해 소박하고 생태적인 삶을 실천해보고 싶었습니다. 가능하면 문명의 이기를 멀리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여주 집에는 일부러 TV나 컴퓨터를 들여놓지 않았고 밤에는 전기 대신 주로 촛불을 사용했습니다. 밭에 기르는 작물도 농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원만했던 주민들과의 관계도 시간이 흐르면서 사소한 일로 마찰이 생기고 껄끄러워졌습니다. 사실 몸이 피곤한 것보다 그런 인간관계가 더 힘들었습니다. 직장도 원하지 않게 옮기게 되어 여주에서의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정착하겠다는 계획이 자꾸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주민들과 의사소통에 벽을 느끼게 되면서 시골 생활의 적응에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한때는 동네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아 통행을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많이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에 아내 몸이 나빠진 것도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뒤에 아내는 뇌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때 마침 귀농을 꿈꾸던 지인이 있어 집과 토지를 2007년에 팔았습니다. 7년간의 시도는 좋은 결말을 보지 못한 채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때 매매차익에 대해서 투기로 분류되어 3년 뒤인 지금에야 이렇게 중과세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투기 목적이었다면 당시에 낮은 가격으로 처분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농지에 대한 투기를 막기 위해 세무 행정이 엄격하게 집행되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규정을 너무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선의의 피해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는 너무 억울합니다. 7년간 100% 저희 부부의 노동으로 밭을 경작했고, 또 상당한 비중의 날들을 실제 여주에서 거주했습니다. 비록 직장이 서울에 있어 그 거리가 가깝다고는 할 수 없으나 300여 평의 밭작물을 재배하는데 결정적으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여주에 전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주에서의 7년 동안은 가족여행 한 번 가지 못했으며 제 개인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밭이나 집을 다른 사람에게 대여한 사실도 없습니다.


여주의 땅을 사고, 집을 짓고, 파는 과정에서 하늘에 맹세코 투기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 개인적으로는 그 과정에서 상당한 재산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 동안 서울 집값이 많이 올라 여주 땅을 판 돈으로는 도저히 서울에 집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전세로 살고 있는데 내년에 경기도 광주에 분양 받은 아파트로 입주를 합니다.


이 세금 부과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해명하지 못하는 저 자신도 무척 답답합니다. 그러나 여주 밭과 여주 집은 실제 제가 경작하고 거주했음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주 밭을 구입한 것은 순수한 귀농의 목적이었지 절대로 투기의 의도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여주 생활에 대한 경위와 제 개인적인 심정을 솔직히 말씀 드렸습니다. 부디 잘 살펴주시어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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