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나를 찾아가는 여행

샌. 2010. 9. 18. 13:06

은퇴를 대하는 관점이 변한다면 은퇴 후의 삶이 그리 두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도리어 축복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할 일이 없어진다는 점을 제일 두려워한다. 또한 사회적 소속이 없어진 뒤의 소외감도 견디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은퇴는 상실이고 고통이다. 그러나 은퇴를 자신의 삶을 찾는 계기로 받아들인다면 은퇴는 새로운 삶의 출발이 된다. 은퇴를 기점으로 삶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며칠 전에 전 직장의 K, M 두 선배와 우연히 통화를 했다. 두 분은 몇 년 전에 정년퇴임했다. 그분들은 내 계획에 대해 극구 만류를 했다. 끝까지 붙들고 견디라고 했다. 열에 아홉은 그렇게 말린다. 나오면 금방 늙어버린다는 말도 들었다. 선배의 말이 진심 어린 충고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으로서는 그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은퇴는 나를 찾아가는 여행의 출발점이다. 지금까지는 일과 관계에 매여 솔직히 나를 진실 되게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내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살았다. 그런 구속과 껍질이 벗겨지는 것이 은퇴다. 삶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은퇴 뒤의 삶에서는 고독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자아와 솔직한 대면이 이루어질 수 있다. 새로운 삶의 양식이 어색하고 두려울 수 있다. 그러나 다시 옛날의 일로 후퇴하는 것은 비겁하다. 사람은 자신만의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은퇴 후의 삶은 여백이고 쉼이다. 여백을 즐길 줄 안다는 것은 일을 잘 하기보다 어렵다. 제대로 쉬는데도 내공이 필요하다. 소인들은 빈 시간이 주어져도 어찌 할 줄은 모른다. 일개미마냥 일이 없으면 불안해진다. 사회적으로는 출세했는지 몰라도 삶의 질 측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기 힘들다. 특히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일수록 혼자만의 시간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은퇴 뒤의 삶은 각자의 여건이나 바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은퇴 뒤의 삶을 건강하게 보내려면 정신적으로 홀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의 유무와는 상관없다. 얼마 전에 본 <논어>에는 군자(君子)를 ‘자율적 인간’으로 번역했다.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자란 스스로 인간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이 개념은 도전적이고 역동적이다. 은퇴 뒤의 삶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본다. ‘獨立不懼 遁世不悶’이라는 옛말도 있다. 홀로 섬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서 멀어짐을 근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의례 무슨 일을 할 것이냐고 묻는다. 대답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이 말하는 ‘일’의 소중함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서 대화의 접점을 찾기가 어렵다. 그런 ‘일’이라면 나는 없어야 좋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일은 그들 입장에서는 일의 범주에 넣어주기 어려울 것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하면 그건 아무나 하는 짓이 아니라고 하고, 꽃과 나무를 찾아다니는 게 좋다고 하면 그건 취미생활일 뿐이라고 한다. 생각이 많이 다르다.


어제는 옆 자리의 조교가 수세미를 선물했다. 자신이 직접 실로 짜서 만들었다고 한다. 앞으로 설거지를 할 일이 많을 텐데 잘 되었네, 하며 고맙게 받았다. 나에게는 타이밍이 적절한 선물이 되었다. 앞으로는 설거지뿐만 아니라 요리도 배워야 할 것 같다. 그밖에도 홀로서기에 필요한 것들이 있다. 의외로 작고 사소한 것들이 사실은 중요한 것임을 깨닫는다. 앞으로 나를 찾아올 삶의 변화를 감사히 받아들이며 새로운 삶에서 의미를 찾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는 지금 나를 찾아가는 여행의 출발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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