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백가기행

샌. 2010. 10. 18. 13:46

내 살 집을 내 손으로 짓고, 내 먹을거리는 내 노동으로 기르며 사는 걸 이상으로 생각했다. 7년 전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다시 한 번 나에게 기회가 올지 모르지만 이젠 무척 두렵고 조심스러워질 것 같다. 쓴 맛은 좋은 인생 경험이 되었다.


<백가기행>(百家紀行)은 조용헌 씨가 쓴 집에 관한 책이다. 저자가 전국을 돌아보며 만난 명가(名家)들이 소개되어 있다. 한 칸짜리 오두막에서 수 백 평 부자의 집까지 스물한 채의 집이 나온다. 한옥도 있고 아파트도 있고 지하에 지은 집도 있다.

집이란 무엇인가? 저자의 말로는 집의 존재 의미는 ‘가내구원’(家內救援)에 있다. 구원은 집 밖이 아니라 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집은 사람에게 위로와 평화를 주는 공간이다. 또한 사는 사람의 인생철학이 담겨있어야 한다. 넓은 평수의 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집에서는 몇 시간 잠자는 게 고작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주택융자금을 갚느라 허덕인다. 집을 신분의 상징이나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은 집의 노예일 뿐이다. 안식의 공간이란 먼 나라 이야기다.


가장 눈길을 끄는 집은 장성 축령산 자락에 도공이 지은 한 칸 오두막이다. 스무 날 동안 혼자서 지었다는 이 집은 모든 자재를 자급자족해서 못 값 28,000원만 들었다고 한다. 남에게 보여주는 ‘사회적 집’이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존재적 집’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집 주인은 방이 좁으니까 오히려 마음이 넓어진다고 말한다. 물건을 들여놓을 공간이 없으니 욕심도 생기지 않는다. 단출한 집은 사람의 삶도 그렇게 만든다. 사람이 공간을 선택하지만 나중에는 공간이 사람의 생각을 지배한다. 산골에 이런 집 하나 지어놓고 가끔씩 내려가 마음의 때를 벗기고 싶다. 내가 원래 상상했던 것도 작은 오두막이었다.


저자는 가내구원을 위한 집의 조건으로 다실(茶室), 정원, 구들장을 꼽는다. 우리나라 국민의 60%가 아파트에 산다고 하는데 아파트는 이런 점에서는 한계가 있다. 이 책에서는 60평대의 아파트가 소개되어 있는데 집 전체를 다실로 꾸며 놓은 집이다. 삭막한 콘크리트 공간이지만 여백이 있고 휴식이 있는 공간으로 재창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이 이런 여유를 가질 수는 없다.


동양학에 조예가 깊은 저자이어선지 풍수를 많이 살핀다. 책에 소개된 집들은 당연히 전부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다. 땅과 집, 그리고 사람 사이에도 궁합이 있는 것 같다. 터를 고르고 집을 지을 때 살펴봐야 할 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무리 첫인상이 좋고 조망이 좋아도 사람이 살기 힘든 센 터가 있다. 풍수를 미신으로 치부할 게 아니라 선조들의 지혜로 받아들여야 하리라고 본다. 또, 집을 짓는 적당한 때가 있다. 결혼하듯 신중해야 한다.


책의 단점이라면 사람의 온기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집에 사는 사람 얘기가 부족하다. 집과 사람 얘기가 같이 어우러졌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백가기행>은 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체면이나 욕심을 버린다면 누구나 자신만의 집 한 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산 속 작은 집을 찾아가는 나를 상상한다.


책에는 부휴선사(浮休禪師)의 시가 나온다.


獨坐深山萬事輕

掩關終日學無生

生涯黙檢無餘物

一椀新茶一卷經


홀로 깊은 심산에 앉아 있으니 지나간 만사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암자 문을 닫고 종일 있으니 무엇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도 들질 않는구나

지난 생애가 단출했으니 방 안에는 별 물건도 없는데

차 사발 하나와 햇차 조금 그리고 경전 한 권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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