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41

더 로드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볼 때는 늘 조마조마하다.소설에서의 감동이 영화에서는 반감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까이는'눈 먼 자들의 도시'가 그랬다.이태 전에 소설로 '더 로드'를읽었었는데 그때 영화로 만든다는 얘기가 있어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기다리던 영화가 드디어 올초에 개봉되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영화는 그런대로 잘 만들어졌다. 우려했던 헐리우드식의 가족 감상주의도 강도가 덜했다. 나는 세상이나 인류의 종말에 대한 관심이 크다. 문명의 파멸은 어떤 식으로 찾아올 것인지, 그리고 파멸 뒤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이 영화 '더 로드'[The Road]에서는 지구 파멸의 과정은 나오지 않는다. 전지구적인 자연의 재앙 탓이라는 것만 암시적으로 주어질 뿐이다. 아마 소행성의..

읽고본느낌 2010.01.23

조개의 깊이 / 김광규

결혼을 한 뒤 그녀는 한 번도 자기의 첫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도 물론 자기의 비밀을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렇잖아도 삶은 살아갈수록 커다란 환멸에 지나지 않았다. 환멸을 짐짓 감추기 위하여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을 했지만, 끝내 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환멸은 납가루처럼 몸속에 쌓이고, 하지 못한 말은 가슴속에서 암세포로 굳어졌다. 환멸은 어쩔 수 없어도, 말은 언제나 하고 싶었다. 누구에겐가 마음속을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마음 놓고 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비슷한 말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다가 그런 구절이 발견되면 반가워서 밑줄을 긋기도 했고, 말보다 더 분명한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

시읽는기쁨 2009.10.20

무릎을 잊어버린다 / 엄원태

한동안 무릎은 시큰거리고 아파서 내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다. 아침산책 몇 달 만에 아프지 않게 되자 무릎은 쉽게 잊혀졌다. 어머니는 모시고 사는 우리 부부에게 무관심하고 무뚝뚝하시다. 때로는 잘 삐치시고 짜증까지 내신다. 어머니 보시기에, 우리가 아프지 않은 탓일게다. 아직도 삼시 세 끼를 꼭 챙겨드려야 마지 못한 듯 드신다. 어쩌다 외출이 길어져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그때까지 밥을 굶으시며 아주 시위를 하신다. 어머니는 우리 부부에게 아픈 무릎이다. 그런 어머니에게 안 깨물어도 아픈 손가락이 있다. 아우는 마흔 넘도록 대척지인 아르헨티나로 멕시코로 홀로 떠돌아다닌다. 아우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각별하시다. 아우는 어머니의 아픈 무릎이다. - 무릎을 잊어버린다 / 엄원태 누구에게난 아픈 무릎..

시읽는기쁨 2009.02.09

식구 / 유병록

매일 함께 하는 식구들 얼굴에서 삼시 세 끼 대하는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때마다 비슷한 변변찮은 반찬에서 새로이 찾아내는 맛이 있다 간장에 절인 깻잎 젓가락으로 집는데 두 장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아 다시금 놓자니 눈치가 보이고 한번에 먹자 하니 입 속이 먼저 짜고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데 나머지 한 장을 떼내어 주려고 젓가락 몇 쌍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이런 게 식구겠거니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내 식구들의 얼굴이겠거니 - 식구 / 유병록 식구(食口)라는 단어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사람을 '먹는 입'으로 표현한 것이 인간의 체통을 깎아내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난했던 옛날에는 먹는 것이야말로 제일 중차대한 일이었을 것이다. 먹을거리가 부족하면 사람이 '먹는 입'으로밖에 보일 수 없..

시읽는기쁨 2008.09.26

마지막 선물

무료한 겨울 오후, 아내가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딱히 보고 싶은 영화도 없었지만둘이서 집가까이 있는영화관으로 나갔다.상영되는 여러 편의 영화중에서 고른 것이 '마지막 선물'... '마지막 선물'은 눈물샘을 자극하는 가족 영화라 할 수 있다. 마치 안방에서 TV 드리마를 보는느낌이 들었다. 얘기의 전개나 설정에 작위성이 나타나지만 가족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늘 함께 있지만 그 소중함을 잊게 되는 가족,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는 목숨까지 내어줄 수 있는 관계가 가족이다. 한 마디로 딸을 살리기 위한 두 아빠의 노력이 눈물겹다. 감정이 둔한 나도 몇 번인가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고등학교 친구 사이인 영우(허준호)와 태주(신현준)는 한 명은 경찰로, 한 명은 살인죄를 지은 무기수로..

읽고본느낌 2008.02.13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 안도현

어릴 때, 두 손으로 받들고 싶도록 반가운 말은 저녁 무렵 아버지가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정육점에서 돈 주고 사온 것이지마는 칼을 잡고 손수 베어온 것도 아니고 잘라온 것도 아닌데 신문지에 둘둘 말린 그것을 어머니 앞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한 마디, 고기 좀 끊어왔다는 말 가장으로서의 자랑도 아니고 허세도 아니고 애정이나 연민 따위 더더구나 아니고 다만 반갑고 고독하고 왠지 시원시원한 어떤 결단 같아서 좋았던, 그 말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이웃에 고기 볶는 냄새 퍼져나가 좋을 거 없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지 그래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방문을 꼭꼭 닫고 볶은 돼지고기를 씹으며 입 안에 기름 한입 고이던 밤 -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 안도현 이번에 안도현..

시읽는기쁨 2008.02.13

여서(女書)를 받고 / 조운

너도 밤마다 꿈에 나를 본다 하니 오고 가는 길에 만날 법도 하건마는 둘이 다 바쁜 마음에 서로 몰라보는가 바람아 부지 마라 눈보라치지 마라 어여쁜 우리 딸의 어리고 고운 꿈이 날 찾아 이 밤을 타고 이백 리를 온단다 - 조운 / 여서(女書)를 받고 어느 날 멀리 떨어져 있는 딸로부터 아버지는 편지를 받는다. 아마 그 편지에는 밤마다 아버지의 꿈만 꾼다는 딸의 애절한 사연이 젹혀 있었을 것이다. 자식의 편지를 받고 그리움과 안타까움에서러운 부정(父情)이 이 시에 잘 묘사되어 있다. 오죽했으면 딸이 찾아오는 꿈자리를 방해하지 말라고 '바람아 부지 마라'고 하며 애원을 할까. 부모와 자식 사이를 천륜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고금에 차이가 없을 것이다. 특히 부모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야더 말할 나위가..

시읽는기쁨 2007.12.26

妻城子獄

집안이 답답해서 밖으로 나갔다. 힌두교에서는나이 오십이 넘으면 임서기(林棲期)라고 해서 처자를 떠나 숲속에서종교적 명상을 하며 산다고 한다. 처자 부양을 벗어난 남자에게 허용된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집안의 굴레에 갇혀 마누라 엉덩이나 만지고 아이들 재롱이나 보면서 지내서는 큰 공부나 깨달음은 불가능하다. 석가가 그랬고, 예수가 그랬다. 그래서승려들이나 성직자들, 수도자들이 독신을 고수하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가정과 수도 생활을 동시에 이루어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꼭 수도 생활에만 국한시킬 필요없이 살다 보면 해 보고 싶은 일이 있을지라도 가족의 반대나 생계에 매여 포기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을남자에게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고, 여자의 입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자 입장..

사진속일상 2006.08.21

봄 감기

봄 감기가 가족 전체에게 찾아왔다. 제일 먼저 아내에게 나타난 증상이 아이들을 거쳐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아내는올봄에 특히 더 힘들어한다. 감기뿐만 아니라 몸 이곳저곳이 아파 몇 주째 바깥 나들이를 못하고 집안에서 지내고 있다. 우리 가족에겐 잔인한 봄이 되고 있다. 젊은 아이들은빨리 회복이 되는데 어른들은 아무래도 시간이 걸린다. 아내는 약과 병원을 무척 좋아한다. 좋아한다기 보다는 믿는 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반면에 나는 되도록이면 병원이나 약 사용을 삼가한다. 한번 아플 때마다약을 먹어라, 병원에 갔다와라는 아내의 잔소리와, 안 먹는다, 안 간다라는 내 고집이 부딪쳐 마찰음이 난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감기의 경우에는 약의 효능을 나는 별로 믿지 않는다. 대신에 최상의 방법은 푹 쉬는 것이라고 ..

사진속일상 2006.04.04

가정 /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동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가정 / 박목월 아버지가 그립다. 이젠 찾아볼 길 없는 아버지의 위엄과 권위가 그립다. 지금 아..

시읽는기쁨 2004.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