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9

가을의 시 / 장석주

가을이 오면 어제 굶은 자를 하루 더 굶게 하고 오래된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고 슬픈 자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주소서. 부자에게선 재물을 빼앗고 학자에게는 치매를 내리소서. 재물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소서. 육상선수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려 혹사당한 뼈와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수도자들과 사제들에게는 금욕의 덧없음을 알게 하소서. 전쟁을 계획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해서 도처에 분쟁과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게 하소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써온 자들은 서정시의 역겨움을 깨닫게 해서 이제 그만 붓을 꺾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집을 찍느라 열대우림이 사라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고요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는 저 무수한 멸망과 죽음들이 이 ..

시읽는기쁨 2023.11.14

사기[3-1]

공자가 주나라에 가 머무를 때 노자에게 예(禮)를 묻자 노자는 대답했다. "당신이 말하는 사람들은 그 육신과 뼈가 이미 썩어 없어지고 오직 그들의 말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또 군자는 때를 만나면 달려가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쑥처럼 이리저리 떠도는 모습이 되오. 내가 듣건대 훌륭한 상인은 물건을 깊숙이 숨겨 두어 텅 빈 것처럼 보이게 하고,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있지만 모양새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였소. 그대의 교만과 지나친 욕망, 위선적인 모습과 지나친 야심을 버리시오. 이러한 것들은 그대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소." 초나라 위왕(威王)은 장자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후한 예물을 주고 재상으로 맞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장자는 웃으며 초나라 왕의 사신에게 말했다. ..

삶의나침반 2023.07.19

속 빈 것들 / 공광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 줄기에서 슬픈 숨소리가 흘러나와 피리를 만들어 불게 되었다는 갈대도 그렇고 시골집 뒤란에 총총히 서 있는 대나무도 그렇고 가수 김태곤이 힐링 프로그램에 들고 나와 켜는 해금과 대금도 그렇고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회의 마치고 나오다가 정동 길거리에서 산 오카리나도 그렇고 나도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 속 빈 것들과 놀아야겠다 - 속 빈 것들 / 공광규 '서른 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가 비어 있음으로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

시읽는기쁨 2020.02.19

못난이 노자

노자(老子)라고 하면 흰 수염의 할아버지가 연상된다. 이름에서 풍기는 자연스러운 이미지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못난이 노자'는 열아홉 살 고등학생이다. 그것도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그의 짝인 은정이도 비슷한데, 은정이는 학교를 자퇴하고 집을 나왔다. 이 두 젊은이가 노자의 가르침을 익히고 따른다. 그런 역발상이 재미있다. 송기원 소설가가 쓴 는 두 젊은이의 생각과 삶을 통해 을 풀이한다. 그래서 아주 쉽게 쓰였다. 오래전 에 연재될 때 읽었었는데 단행본으로 나왔다. 은 81장으로 되어 있지만, 책에서는 12장만 선별하여 해설한다. "생긴 대로 살자." "못난이가 힘이다." "노자를 알면 천하무적이 된다." 이런 주제가 반복해서 나온다.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노자의 ..

읽고본느낌 2019.01.20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최진석 선생은 EBS의 '노자 강의'를 통해 화면으로 뵌 적이 있다. 전 편을 다 본 것은 아니었지만, 명료하고 핵심을 찌르는 강의 내용이 노자 철학을 바라보는 관점을 세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열정적인 강의 태도도 인상 깊었다. 은 그때의 강의를 기반으로 엮은 책이다. 우선 이 책을 통해 노자 철학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주나라 이전까지는 천명의 시대였으나 시대 상황의 변화가 인간이 주도하는 역사를 설명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면서 덕(德)과 도(道)의 개념이 나타나고, 하늘 대신 인간 중심의 철학이 공자와 노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공자와 노자는 같은 소명을 받았지만 서로 지향하는 방향은 달랐다. 노자의 눈에 들어온 이 세계는 존재하는 형식이나 운행하는 원칙이 상호의존관계로 ..

읽고본느낌 2017.08.13

춘추전국 이야기

공자(BC 551~479)는 춘추시대 후기에 살았다. 시대 구분을 보면 춘추시대는 주나라가 수도를 낙읍으로 옮긴 BC 770년에서 BC 403년까지, 전국시대는 BC 403년에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BC 221년까지다. 공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 배경을 알아야겠기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는 공원국 선생이 쓰고 있는데 전체 12권으로 계획되고 있다. 현재 9권까지 출판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이번에 3권까지 읽었다. 춘추오패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1권이 제(齊) 환공, 2권이 진(晉) 문공, 3권이 초(楚) 장왕을 다루고 있다. 춘추시대 중기까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나라의 세력이 약해졌지만 그래도 제후국이라는 명분이 유지되고 있던 때가 춘추시대였다. 형식적이었다해도 주로부터 권위..

읽고본느낌 2016.09.04

삶은 단순하고 내 몸은 튼튼하니까

이름난 현사(賢士)의 수사학적 명언보다 평범한 사람의 보통 말에 감동할 때가 있다. 필리핀 시골 마을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고기잡이하며 살아가는 어부가 자신의 행복을 이렇게 표현했다. "삶은 단순하고 내 몸은 튼튼하니까요."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여행 프로그램에서였다. 인류가 문명의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는 건 고작 100여 년 정도밖에 안 된다. 나머지 대부분 기간은 농경을 중심으로 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삶은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고, 이웃과의 관계는 따스했다. 서로 도우며 상부상조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는 부족한 게 많았을지라도 현대적 의미의 가난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풍족해도 과잉 욕망과 상대적 결핍이 빈곤을 생산한다. 필리핀 어부가 한 말 속에 ..

참살이의꿈 2013.10.15

소설 공자

는 최인호 작가의 근작 장편소설이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여러 사료에 근거하여 공자의 삶을 재구성했다. 공자의 출국과 주유천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가 오늘과 별로 다르지 않다. 2천 년 전 예수가 살았던 유대 사회도 마찬가지다. 성인의 삶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게 되는 책이다. 책에는 공자 외에 노자와 장자, 예수 이야기도 나온다. 공자의 사상과 비교하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유가와 도가의 차이를 좀더 명료하게 알 수 있었다. 그런 차이가 그분들의 삶에서도 완연히 드러난다. 노자는 세상에 알려지자 함곡관을 통해 사라졌지만, 공자는 끝없이 세상과 권력을 찾아 들어간다. 불가능한 일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가시밭길을 가는 것이다..

읽고본느낌 2012.08.28

생명

작년 가을에 이웃에서 꽃잔디 몇 줄기를 꺾어다 집 주위에 심었다. 그 당시 상황이 무척 힘들었을 때라서 꽃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도 못했는데 겨울이 되니 새까맣게 말라 버려서 죽었는가 보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봄이 되니 어느 날 갑자기 한 무더기의 꽃을 피어 올렸다. 이걸 보니 작은 풀꽃에 불과할지라도 그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꽃을 보면 희망을 떠올린다. 또 고맙고 미안하다. 우리가 미물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나 작은 풀꽃에 들어있는 이런 생명력을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그것은 인간 속에도 내재하는 생명력과도 동일하며 서로 통하고 있다고 본다. 이 우주는 생명의 바다이다. 어느 책에서 한 스님의 일화를 읽은 적이 있다. 태백산 깊은 암자에서 수행하시던 분인데, 늘 새들이..

사진속일상 2004.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