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16

깊은 밤 / 도종환

어려서 아버지께 편지를 자주 쓴 것첫 줄을 쓰기 위해 별을 올려다본 것슬픈 밤마다 별들과 가만히 눈을 맞춘 것실패한 아버지를 찾아 떠도는어머니가 보고 싶어 혼자 조용히 운 것수업 시간에 창 밖을 자주 내다본 것화폭에 칠한 색감에 몰입하는 시간이 좋았던 것수시로 도서실로 달려가던 오후'사랑이 무성한 수풀' 같은 소설 제목에 끌려무성한이란 말과 수풀에 대해 수많은 상상을 한 것나이 들어서 결국 숲속에서 살게 되었고영혼을 편하게 하는 일이 숲의 일이란 걸 알게 된 것내 인생에서 잘한 일을 들라면나는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진 것인내의 길이를 길게 늘여가는 게 시간이고시간이야말로 은혜롭다는 것시간이 사람을 깊게 한다는 말을 믿은 것어머니에게 여린 마음의 씨앗을 물려받은 것그 씨앗이 자라제비꽃 ..

시읽는기쁨 2024.09.15

가을 오는 하늘

가을이 몇 발자국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한낮 햇살은 따가워도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은 선선해졌다. 매미 소리는 잦아들고 풀벌레들 노랫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간다. 하늘도 가을이 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뜨거운 열기에서 벗어났는지 더 푸르러 보이고, 구름 모양도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 붓을 부드럽게 터치해서 그린 듯한 권운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에 하늘을 자주 쳐다봤다.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는 구름의 움직임이 재미있었다. 꽤 오래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는 구름이 있는가 하면, 어떤 구름은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금방 변신을 했다. 하늘이 연출하는 변검술이었다. 하늘 하나만으로도 오가는 길이 즐거웠다. 이 또한 파적(破寂)의 하나가 아니겠느냐고 흐뭇해하면서.  도종환 시인의 시집을..

사진속일상 2024.09.01

다시 아침 / 도종환

내게서 나간 소리가 나도 모르게 커진 날은 돌아와 빗자루로 방을 쓴다 떨어져 나가고 흩어진 것들을 천천히 쓰레받기에 담는다 요란한 행사장에서 명함을 잔뜩 받은 날은 설거지를 하고 쌀을 씻어 밥을 안친다 찬물에 차르르 차르르 씻겨나가는 뽀얀 소리를 듣는다 앞차를 쫓아가듯 하루를 보내고 온 날은 초록에 물을 준다 꽃잎이 자라는 속도를 한참씩 바라본다 다투고 대립하고 각을 세웠던 날은 건조대에 널린 빨래와 양말을 갠다 수건과 내복을 판판하게 접으며 음악을 듣는다 가느다란 선율이 링거액처럼 몸속으로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걸 느끼며 눈을 감는다 - 다시 아침 / 도종환 시인이 마음을 정화하듯 하는 행위를 나 역시 집에서 일상으로 한다. 방 쓸기, 설거지와 밥 안치기, 초록에 물 주기, 빨래 개기 등은 퇴직 이후..

시읽는기쁨 2020.12.10

무심천 / 도종환

한세상 사는 동안 가장 버리기 힘든 것 중 하나가 욕심이라서 인연이라서 그 끈 떨쳐버릴 수 없어 괴로울 때 이 물의 끝까지 함께 따라가 보시게 흐르고 흘러 물의 끝에서 문득 노을이 앞을 막아서는 저물 무렵 그토록 괴로워하던 것의 실체를 꺼내 물 한 자락에 씻어 헹구어 볼 수 있다면 이 세상 사는 동안엔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어긋나고 어긋나는 사랑의 매듭 다 풀어 물살에 주고 달맞이꽃 속에서 서서 흔들리다 돌아보시게 돌아서는 텅 빈 가슴으로 바람 한 줄기 서늘히 다가와 몸을 감거든 어찌하여 이 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 무심히 흘러오고 흘러갔는지 알게 될지니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 욕심을 다 버린 뒤 저녁 하늘처럼 넓어진 마음 무심이라 하나니 다 비워 고요히 깊어지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

시읽는기쁨 2018.12.20

운명 / 도종환

당신 거기서도 보이십니까 산산조각난 당신의 운명을 넘겨받아 치열한 희망으로 바꿔온 그 순간을 순간의 발자욱들이 보이십니까 당신 거기서도 들리십니까 송곳에 찔린 듯 아프던 통증의 날들 그 하루하루를 간절함으로 바꾸며 이겨낸 승리 수만마리 새 떼들 날아오르는 날갯짓 같은 환호와 함성 들리십니까 당신이 이겼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당신 때문에 오래 아팠습니다 당신 떠나신 뒤로 야만의 세월을 살았습니다 어디에도 담아둘 수 없는 슬픔 어디에도 불지를 수 없는 분노 촛농처럼 살에 떨어지는 뜨거운 아픔을 노여움 대신 열망으로 혐오 대신 절박함으로 바꾸며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해마다 오월이 오면 아카시아 꽃이 하얗게 지는 오월이 오면 나뭇잎처럼 떨리며 이면을 드러내는 상처 우리도 벼랑 끝에 우리 운명을 세워두고 했다는 걸..

시읽는기쁨 2017.06.04

돌아가는 꽃 / 도종환

간밤 비에 꽃 피더니 그 봄비에 꽃 지누나 그대로 인하여 온 것들은 그대로 인하여 돌아가리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잠시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저녁 햇살로 그늘지리 - 돌아가는 꽃 / 도종환 부활절인 오늘은 세월호 3주기가 되는 날이기도 하다. 세월호를 기억하며 드리는 미사에서 옆자리 아주머니는 세월호 영상을 보며 하염없이 흐느끼신다. 그 슬픔의 깊이가 어떠한지 나는 잘 헤아리지 못한다. 다만 먹먹할 뿐이다. 경안천에 나가 꽃을 보며 이 시를 읊조린다. "그대 곁에 있는 것들은 / 언제나 잠시 // 아침 햇빛에 아름답던 것들 / 저녁 햇살로 돌아가리". 생명 사이의 인연이 그런 것이리, 찡 해진 가슴으로 뿌연 봄하늘을 바라본다.

시읽는기쁨 2017.04.16

화인 / 도종환

비 올 바람이 숲을 훑고 지나가자 마른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떨어져 내렸다 오후에는 먼저 온 빗줄기가 노랑붓꽃 꽃잎 위에 후두둑 떨어지고 검은등뻐꾸기는 진종일 울었다 사월에서 오월로 건너오는 동안 내내 아팠다 자식 잃은 많은 이들이 바닷가로 몰려가 쓰러지고 그것을 지켜보던 등대도 그들을 부축하던 이들도 슬피 울었다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섬 사이를 건너다니던 새들의 울음소리에 찔레꽃도 멍이 들어 하나씩 고개를 떨구고 파도는 손바닥으로 바위를 때리며 슬퍼하였다 잊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눈물을 털고 일어서자고 쉽게 말하지 마라 하늘도 알고 바다도 아는 슬픔이었다 남쪽 바다에서 있던 일을 지켜본 ..

시읽는기쁨 2016.04.16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도종환 시인이 국회의원이 된 후 작은 소동이 있었다. 교육과정평가원에서 도 시인의 시를 교과서에서 빼라고 출판사에 통보한 것이다. 결국은 없었던 일로 되었지만 경직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 해프닝이었다. 그 뒤에 국회 본회의에서 시인은 5분 자유발언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발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존경하는 박병석 부의장님,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도종환입니다. 저는 오늘 착잡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저는 국회의원이면서 시인입니다. 제가 쓴 시는 10년 전부터 국정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고, 학생들이 배우고 공부해 왔습니다. 공문에 의하면 수정보완 이행 결과가 미진하면 검정이 취소될 수 있다고 돼 있습니다. 지금까지 교과서 수정보완은 띄어쓰기, 맞춤법, 어휘 ..

읽고본느낌 2012.08.05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담쟁이 / 도종환 2009년에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이 시가 내 인생에서 꼭 간직하고 싶은 시 1위를 차지했다. IMF 구제금융 이후부터 이 시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가 위안과 용기를 주는 이런 시를 찾았을 것이다...

시읽는기쁨 2012.07.25

부석사에서 / 도종환

오백년 천년을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가슴께에 칠해진 어지러운 원색의 빛깔들 여름이면 바다처럼 펼쳐진 산줄기에 나누어주고 가을이면 새빨간 빛깔들 뒷산 숲에 던져주고 나머지 짙게 덧칠해진 단청빛마저 마음에 걸려 바람에 던져주고 하늘에 풀어주고 세월 속에 가장 때묻지 않은 얼굴빛으로 엷어져 본래 제가 지녔던 나무 빛깔로 돌아오며 겸허해지고 담백하게 욕심을 벗어 더욱 굳세어지고 그렇게 버리면서 육백년을 지나왔으려니 백년도 백년의 절반도 다 못 살면서 더 화려하고 더 강렬할 빛깔을 지니고자 더 큰 목소리와 더욱 단단한 기둥을 거느리고자 기를 쓰다가 허세부리다가 우리들은 사바세상 티끌과 먼지로 사라지느니 진정 오래오래 사는 길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요란한 파격은 애당초 마음에 두지 않았던 맞배지붕은 보여주..

시읽는기쁨 2010.09.29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고향으로 내려가는 설날 귀향길에 올해는 톨게이트에서시낭송 CD를 나누어주었다. 솔직히 4대강이나 세종시 홍보물을 받으면 어쩌나 했는데 의외였다. 덕분에 시와 함께 하는 고향길이 되었다. 아는 시가 나오면 반가웠고, 더구나 시인의 육성으로 들으니 더욱 좋았다. 가슴이 울컥해지는 시가 몇 편 있었는데 이 시도 그중의 하나였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

시읽는기쁨 2010.02.15

군무 / 도종환

우포늪에서 무리지어 내려앉는 새떼를 본 적이 있다 분홍빛 발갈퀴를 앞으로 뻗으며 물 위에 내리는 그들의 경쾌한 착지를 물방울들이 박수를 튀기며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을 물든 하늘 한쪽에 점묘를 찍으며 고니떼가 함께 날아오르자 늪 위를 지나가던 바람과 낮은 하늘도 따라 올라가 몇 개의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먹고 사는 일이 멀리서 보는 것과 달라서 그리 녹녹한 일은 아니지만 그들의 눈은 맹금류처럼 핏발 서 있지 않았다 솔개나 올빼미가 뜰 때는 주변의 공기도 팽팽하게 긴장을 하고 하늘도 일순 호흡을 멈추며 피 묻은 부리와 살 깊숙이 파고들어간 날카로운 발톱을 주시하는데 물가의 새들은 맹금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만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살아남고 ..

시읽는기쁨 2009.03.01

조팝나무

우리나라 봄풍경을 대표하는꽃 중의 하나가 조팝나무다. 화사한 흰색의 조팝나무꽃은 멀리서도 눈에 잘 띄면서 봄기운을 잔뜩 북돋워준다. 꽃망울을 잔뜩 달고 환하게 웃는 듯한 조팝나무꽃은 그러나 색깔이 튀지 않고 소박해서 우리네 정서와도 잘 맞는다. 요사이는 조팝나무를 들에서 자주 만나지만 예전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조팝나무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아마 조팝나무는 근래에 들어 많이 심게 되지 않았나 내 나름대로 추정할 뿐이다. 조팝나무 줄기는 생긴 것이 개나리와 비슷하고 생명력이 질긴 것도 서로 닮았다. 노란 색의 개나리와 함께 흰색의 조팝나무는 우리나라 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조팝나무는 원래 조밥나무로 불리었는데 그 이름이 자연스럽게 조팝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 꽃이 피는 시기..

꽃들의향기 2007.05.15

다시 떠나는 날 / 도종환

깊은 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물고기처럼 험한 기슭에 꽃 피우길 무서워하지 않는 꽃처럼 길 떠나면 산맥 앞에서도 날개짓 멈추지 않는 새들처럼 그대 절망케 한 것들을 두려워하지만은 않기로 꼼짝 않는 저 절벽에 강한 웃음 하나 던져 두기로 산맥 앞에서도 바람 앞에서도 끝내 멈추지 않기로 - 다시 떠나는 날 / 도종환 열정과 여유를 함께 생각한다. 조급한 열정은 쉬이 끓고 쉬이 식지만, 여유를 머금은 열정은 고난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높은 산맥을 만나도 날개짓을 멈추지 않는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 어둠이 짙을 수록 별빛은 더욱 반짝인다. 실패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실패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이 두려운 일이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나를 쓰러뜨린다. 이젠 날 절망케 ..

시읽는기쁨 2006.11.13

어릴 때 내 꿈은 / 도종환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애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 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얘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꽃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 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자라서 내 꿈대로 선생님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그런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 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 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럴 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시읽는기쁨 2005.12.16

그리운 강 / 도종환

사람들은 늘 바다로 나갈 일을 꿈꾸지만 나는 아무래도 강으로 가야겠다 가없이 넓고 크고 자유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작고 따뜻한 물소리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해일이 되어 가까운 마을부터 휩쓸어버리거나 이 세상을 차갑고 거대한 물로 덮어버린 뒤 물보라를 날리며 배 한 척을 저어나가는 일이 한 번쯤 있었으면 하지만 너무 크고 넓어서 많은 것을 가졌어도 아무 것도 손에 쥐지 못한 것처럼 공허한 바다가 아니라 쏘가리 치리 동자개 몇 마리만으로도 넉넉할 수 있는 강으로 가고 싶다 급하게 달려가는 사나운 물살이 아니라 여유 있게 흐르면서도 온 들을 적시며 가는 물줄기와 물살에 유연하게 다듬어졌어도 속으론 참 단단한 자갈밭을 지나 천천히 걸어오고 싶다 욕심을 버려서 편안한 물빛을 따라 흐르..

시읽는기쁨 2005.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