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41

찬지름 들지름 / 송진권

찬지름 들지름 들이 서울 갑니다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강변에 모랫벌에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가 여름내 김매고 땀 흘려 가꾼 참깨 들깨 들이 찬지름 들지름이 되어 소주병에 담겨 서울 가는 기차를 탑니다 마른 나무 강변말 해바라기 선 집 들지름 발라 김 구워 주면 미어지게 먹던 막내를 생각합니다 날달걀 깨서 찬지름 떨어뜨려 밥 비벼 주면 다른 반찬 없이도 한 그릇 해치우던 맏이를 생각합니다 - 찬지름 들지름 / 송진권 가을은 아프다. 연로하신 어머니가 지은 농작물을 갖고 오는 것도 죄스럽다. 가을이 되면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더해진다. "나도 이제 따스한 밥 얻어먹고 싶다." 가을은 불효를 자각하고 속울음을 삼키게 되는 계절이다. 충청도에서는 '찬지름 들지름'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자식을 향한 모정이 '..

시읽는기쁨 2016.11.07

부지깽이 / 이문구

시골집 나뭇간엔 작대기감도 말뚝감도 안 되어 그냥 노는 막대기가 많은데 어느 날 부지깽이가 되면 부뚜막에 오른 개 엉덩이도 때려 주지만 불을 때며 아궁이를 들락거리며 불땀 없는 땔감을 괄게 태우고 잉걸불 끌어내어 화로에 담으면서 제 몸을 태우고 또 태우고 해 하루가 다르게 짧아지다가 드디어 아궁이에 던져져서 불덩이가 되곤 했지 - 부지깽이 / 이문구 고향집 사랑방은 지금도 아궁이에서 불을 때 난방을 한다. 마당에는 어머니가 해 놓은 나뭇더미가 가득하다. 내려가면 군불을 넣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예 내 담당이 되었다. 옛날과 달라진 점은 성냥 대신 일회용 라이터를 쓰고, 부지깽이보다도 철로 된 집게를 더 자주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부지깽이가 없어서는 안 된다. 부지깽이를 쥘 때는 어린 시절을 내 손에..

시읽는기쁨 2016.10.18

금붕어 길들이기 / 이안

처음엔 풀 밑으로 숨기 바빴지 한 번 주고 두 번 주고 며칠 지나니 이제는 살랑살랑 마중을 오네 먹이 몇 번 주었을 뿐인데 금붕어와 나 사이에 길이 든 거야 길든다는 말 길들인다는 말 금붕어와 나 사이에 길이 든다는 거였어 살랑살랑 길을 들인다는 거였어 - 금붕어 길들이기 / 이안 어린왕자는 여우를 만나서 '길들인다'는 게 뭔지 묻는다. 길들여져 있지 않아서 같이 놀 수 없다고 여우가 말했기 때문이다. 여우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관계를 맺는다'라는 뜻이야. 넌 아직 나에게는 다른 수많은 꼬마들과 다를 바 없는 한 꼬마에 불과해. 그러니 나에겐 네가 필요없어. 또한 너에게도 내가 필요없겠지. 난 너에겐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시읽는기쁨 2016.08.09

고만례 할머니와 놋양푼 아줌마 / 이창숙

깊은 산속에 혼자 사는 고만례 할머니는 어느 여름 저녁 모깃불 피운 멍석에 앉아 밤하늘에 솜솜 박힌 별을 세며 옥수수를 먹고 있었대 그때, 머리에 커다란 짐을 인 아줌마가 사립문을 빼꼼 열고 들어오더래 저녁도 못 먹었다는 아줌마에게 있는 반찬에 남은 밥을 차려준 뒤 짐을 풀어 하나하나 살펴보던 할머니는 반짝반짝 빛나는 놋양푼이 그렇게나 좋아 보였다지 뭐야 며칠 뒤 있을 할아버지 제사 때 떡과 나물과 전을 담으면 좋을 것 같았지 한 개에 삼백 원이라는 놋양푼을 두드려 보고 만져 보고 문질러 보다 할머니는 은근하게 흥정을 했대 "세 개 살 테니 천 원에 주슈." 열무 비빔밥을 한입 가득 떠 넣던 놋양푼 아줌마는 눈을 깜빡이며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그렇게는 안 된다고 거절했대 하지만 할머니는 조르고 또 졸..

시읽는기쁨 2015.12.29

엄마와 갓난아기 / 김은영

내 동생 갓난아기 똥을 싸면 소리 내어 운다 "우리 아기 소화 잘 됐네 어쩜 똥도 이뻐라" 엄마가 기저귀 갈고 엉덩이 다독여주면 아기는 방싯방싯 웃는다 중풍 걸린 외할머니 똥을 싸면 눈을 감고 씻긴다 "잡수신 것도 없는데 똥은 왜 이리 많이 싸요 냄새는 왜 이리 구려요" 엄마가 기저귀 갈고 물수건으로 닦아 드리면 가만히 눈물만 흘린다 아주아주 오래 전에 외할머니가 엄마였고 엄마는 갓난아기였다 - 엄마와 갓난아기 / 김은영 손주가 생기고 보니 오직 내리사랑뿐이란 걸 알겠다. 한 대 더 내려갔다고 자식 키울 때와도 비교할 수 없다. 기꺼이든 마지못해든 손주를 봐주는 건 손주가 이쁘기도 하지만 내 새끼의 고생을 덜어주려는 마음도 크다. 전부 아래로만 쏠리는 사랑이다. 위와 견주면 미안하고 송구하다. 우리는 부..

시읽는기쁨 2015.12.03

동네 사람 먼 데 사람 / 이안

뒷산 두릅밭 지나가면서 어린 순 몇 개는 살려두었다 내년 봄이 가까운 동네 사람들 뒷산 두릅밭 지나가면서 우둠지까지 싹뚝싹뚝 잘라서 갔다 내년 봄이 아득한 먼 데 사람들 - 동네 사람 먼 데 사람 / 이안 지구 마을에서 우리는 동네 사람으로 사는 걸까, 먼 데 사람으로 사는 걸까. 아이들도 다 아는 사실을 외면하는 바보들....

시읽는기쁨 2015.04.06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 / 가네코 미스즈

내가 양팔을 활짝 펼쳐도 하늘을 조금도 날 수 없지만 날으는 작은 새는 나처럼 땅 위를 빨리는 달릴 수 없어 내가 몸을 흔들어도 고운 소리 나지 않지만 저 우는 방울은 나처럼 많은 노래 알지는 못해 방울과 작은 새와 그리고 나 모두 달라서, 모두가 좋아 -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 / 가네코 미스즈 가네코 미스즈(1903~1930)은 일본의 동요 시인이다. 27세로 요절한 그녀의 생애는 난설헌을 연상시킨다. 방탕한 생활을 하던 남편은 가네코의 작품 활동과 편지 왕래까지 금지시켰다. 결국 이혼하지만 남편이 자신을 괴롭히려고 딸을 데려가려고 하자 수면제를 먹고 생을 마감했다. 남동생이 보관하던 유고집이 발견되어 그녀의 시가 세상에 드러났다. 작고 여린 것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을 노래하는 가네코의 시는 순수한..

시읽는기쁨 2015.02.07

할아버지 불알 / 김창완

할아버지 참 바보 같다 불알이 다 보이는데 쭈그리고 앉아서 발톱만 깎는다 시커먼 불알 - 할아버지 불알 / 김창완 가수 김창완 씨가 동시 작가가 되었다. 전부터 예쁜 노래 가사를 쓴 재주 많은 분이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나, 발표한 동시를 보니 그분의 얼굴 표정처럼 동심이 해맑다. 나이는 벌써 환갑이 되신 분이다. 아이들의 눈높이가 아니면 이런 할어버지 불알은 보이지 않는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이 곱다. 시가 무척 재미있어서 깔깔깔 웃었다. 김창완 씨가 어느 신문과 인터뷰를 했는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내가 네 살 무렵에 뛰어놀다가 넘어졌는데 바늘이 손바닥에 들어갔어요. 바늘이 부러진 채 박혀버렸지요. 막 울고불고 난리치니까 할아버지가 망치로 손바닥을 막 때렸..

시읽는기쁨 2014.10.10

깨알 같은 잘못 / 이창숙

졸업이구나, 너희들과 헤어지게 되어 아쉽다. 선생님, 그동안 우리들이 속 썩여서 미안해요. 너희들이 속은 무슨 속을 썩여. 그냥 말 좀 안 듣고, 숙제 안 해 오고, 귀청 떨어지게 떠들고, 쌈박질 좀 하고, 수업 시간에 뛰쳐나가고, 음, 와장창 유리창 깨고, 다른 선생님한테 걸려서 귀 잡혀 들어오고, 꼬박꼬박 대들고, 봄날 병아리들처럼 비실비실 졸고, 욕 좀 하고, 몰래 침 뱉고, 무릎 까져서 피 질질 흘리고, 음음, 높은 곳에서 떨어져 간 떨어지게 하고, 입 아프게 설명해도 단체로 멍 때리고, 저번에는 참, 다섯 분이 한꺼번에 땡땡이도 치셨지? 아무튼, 그런 일들밖에 없었는걸 뭐. 그러네요. 헤헤헤헤 히히히히 - 깨알 같은 잘못 / 이창숙 동시의 대상이 아이들이다 보니 학교 소재가 많다. 어떻게 하면 ..

시읽는기쁨 2014.07.10

Z교시 / 신민규

식물은 뿌리, 줄기, 잎, 꽃, 열매로 이뤄져 있다 뿌리는 식물체를 지지하고 물과 양분을 꾸벅한다 줄기는 꾸벅을 지탱하고 물과 꾸벅이 이동하는 꾸벅 잎은 꾸벅을 이용하여 꾸벅을 꾸벅 꾸벅은 꾸벅과 꾸벅이 꾸벅 꾸벅 꾸벅 꾸벅 꾸벅 신민규 뒤로 나가! 번쩍 - Z교시 / 신민규 재미있는 동시다. 흔한 교실의 한 장면이 이렇게도 시가 만들어지는구나. 초등학교 과학 시간인 것 같다. 따분한 설명에 꾸벅이 시작된다. 선생님의 설명과 학생의 꾸벅이 섞이더니 이내 전세가 역전된다. "신민규 뒤로 나가! 번쩍", 결말 부분도 반짝인다. 이 시를 유머러스하게 만드는 데는 제목도 한몫을 하고 있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는 무슨 뜻인가 싶었는데, 금방 무릎을 쳤다. 평범하게 '꾸벅'으로 붙였다면 맛이 덜했을 것이다.

시읽는기쁨 2014.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