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효근 14

낙엽 / 복효근

떨어지는 순간은 길어야 십여 초 그 다음은 스스로의 일조차 아닌 것을 무엇이 두려워 매달린 채 밤낮 떨었을까 애착을 놓으면서부터 물드는 노을빛 아름다움 마침내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죽음에 눈을 맞추는 저 찬란한 투 신. - 낙엽 / 복효근 '투신'은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된 말이다. '낙하'가 아니라 '투신'이라고 한 데에 이 시가 살아 있다. '투신'은 죽음을 회피하거나 죽음에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죽음을 기꺼이 수용하고 맞이하는 태도다. 그래서 아름답고 찬란하다. 가을이 짙어진다. 어디에나 낙엽이 가까이 있다. 발에 밟혀 바삭거리는 낙엽은 재잘대는 아이들처럼 명랑하다. 낙엽한테는 거부의 몸짓을 찾을 수 없다. 생의 막바지에서 왜 노을빛처럼 아름다운지를 생각한다. 올 가을에 낙엽을 보며 내가 떠올려야..

시읽는기쁨 2021.10.30

여름 오는 길

6월이면 여름이 시작되는 달이다. 그 첫날에 뒷산길을 걷다. 이맘 때 숲은 하루가 다르게 풍성해진다. 동네 뒷산인데 깊은 산 속에 온 듯하다. 숲에는 온갖 움직이는 생명들이 모여들고, 그들의 수선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다. 제일 선명하게 들리는 것은 역시 검은등뻐꾸기의 지저귐이다. '홀딱벗고' 새라고 해야 더 알아듣기 쉽겠지. 새 소리를 들으며 재미있는 시 한 편을 꺼내 읽어본다. 복효근 시인의 '검은등뻐꾸기의 전언'이라는 시다. 5월 봄밤에 검은등뻐꾸기가 웁니다 그 놈은 어쩌자고 울음소리가 홀딱벗고, 홀딱벗고 그렇습니다 다투고는 며칠 말도 않고 지내다가 반쯤은 미안하기도 하고 반쯤은 의무감에서 남편의 위상이나 찾겠다고 처지기 시작하는 아내의 가슴께는 건드려보지도 않고 윗도리는 벗지도 않은 채 마악 아내에게..

사진속일상 2019.06.01

꽃을 보는 법 / 복효근

꽃이 지고 나면 그뿐인 시절이 있었다 꽃이 시들면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던 시절 나는 그렇게 무례했다 모란이 지고 나서 꽃 진 자리를 보다가 알았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다섯 개의 씨앗이 솟아오르더니 왕관 모양이 되었다 화중왕花中王이라는 말은 꽃잎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모란꽃은 그렇게 지고 난 다음까지가 꽃이었다 백합이 지고 나서 보았다 나팔 모양의 꽃잎이 지고 수술도 말라 떨어지고 나서 암술 하나가 길게 뻗어 달려있다 꽃가루가 씨방에 도달할 때까지 암술 혼자서 긴긴 날을 매달려 꽃의 생을 살고 있었다 꽃은 그러니까 진 다음까지 꽃이다 꽃은 모양과 빛깔과 향기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랑이 그러하지 않다면 어찌 사람과 사랑을 꽃이라 하랴 생도 사랑도 지고 난 다음까지가 꽃이다 - 꽃을 보는..

시읽는기쁨 2018.10.28

저녁 먹고 동네 한 바퀴 / 복효근

6월 저녁 해 어스름 어둠이 사물의 경계를 지워나갈 때 저녁 먹고 동네 한 바퀴 어두워지는 일이 이리 좋은 것인 줄 이제 알게 되네 흐릿해져서 흐릿해져서 산도 나무도 무엇보다 죽도록 사랑하고 죽도록 싸웠던 일들도 흐릿 흐릿해져서 개망초 떼로 피어선 저것들이 안개꽃이댜 찔레꽃이댜 안개꽃이면 어떻고 찔레꽃이면 어뗘 개망초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뗘 꽃다워서 좋더니만 이제 꽃답지 아니해서 좋네 이녁 화장을 해서 좋더니 화장하지 않아서 좋을 때가 이렇게 왔네 저녁 이맘때의 공기 속엔 누가 진정제라도 뿌려놓은 듯 내 안에 날뛰던 짐승도 순하게 엎드리네 이녁이라고 어디 다를라고 뭐 죽도록 억울하지는 않아서 세상 다 용납하고 받아들이겠다는 듯 어둠 속에 둥글어진 어깨를 보네 이대로 한 이십 년 한꺼번에 더 늙어지면 더..

시읽는기쁨 2018.09.12

아름다운 번뇌 / 복효근

오늘도 그 시간 선원사 지나다 보니 갓 핀 붓꽃처럼 예쁜 여스님 한 분 큰스님한테 혼났는지 무엇에 몹시 화가 났는지 살풋 찌푸린 얼굴로 한 손 삐딱하게 옆구리에 올리고 건성으로 종을 울립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눈을 내리감고 지극정성 종을 치는 모습만큼이나 그 모습 아름다워 발걸음 멈춥니다 이 세상 아픔에서 초연하지 말기를, 가지가지 애증에 눈감지 말기를,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기를 들고 있는 그 번뇌로 그 번뇌의 지극함으로 저 종소리 닿는 그 어딘가에 꽃이 피기를.... 지리산도 미소 하나 그리며 그 종소리에 잠기어가고 있습니다 - 아름다운 번뇌 / 복효근 절에 가면 불이문(不二門)이 있다. 해탈과 번뇌, 정토와 예토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더 깊은 뜻이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받아들인다. 나..

시읽는기쁨 2014.06.08

어떤 나쁜 습관 / 복효근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거시기 슈퍼 아저씨와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는 자기 집 층수보다 한층 위에서 내려 계단을 내려간다 이유를 물으니 자기 집 앞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면 함께 탔던 모기들도 우르르 같이 내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기가 들리지 않을 만한 소리로 복선생도 그렇게 해보라는 충고를 해준다 그 뒤로 나는 모기가 많은 여름날이면 부러 그 집 앞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려서 두 층이나 걸어 올라간다 참 나쁜 습관이다 - 어떤 나쁜 습관 / 복효근 집으로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니 어떤 분이 문을 연 채 기다리고 있다. 감사한 눈인사를 하니, "뒤에 따라오시는 것 같아서..." 라며 수줍게 웃는다. 젊은 여성분이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 뒤에 사람이 따라오는 것 같으면 얼른 문을 닫아 버린다. 같..

시읽는기쁨 2013.12.04

한 수 위 / 복효근

어이, 할매 살라먼 사고 안 살라먼 자꼬 만지지 마씨요 - 때깔은 존디 기지가 영 허술해 보잉만 먼 소리다요 요 웃도리가 작년에 유행하던 기진디 우리 여편네도 요거 입고 서울 딸네도 가고 마을 회관에도 가고 벵원에도 가고 올여름 한려수도 관광도 댕겨왔소 물도 안 빠지고 늘어나도 않고 요거 보씨요 백화점에 납품하던 상푠디 요즘 겡기가 안 좋아 이월상품이라고 여그 나왔다요 헹편이 안 되먼 깎아달란 말이나 허제 안즉 해장 마수걸이도 못했는디 넘 장사판에 기지가 좋네 안 좋네 어쩌네 구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허들 말고 어서 가씨요 - 뭐 내가 돈이 없어 그러간디 나도 돈 있어라 요까이껏이 허면 얼마나 헌다고 괄시는 괄시요 팔처넌인디 산다먼 내 육처넌에 주지라 할매 차비는 빼드리께 뿌시럭거리며 괴춤에서 돈을 꺼내 ..

시읽는기쁨 2013.01.24

타이어의 못을 뽑고 / 복효근

사랑했었노라고 그땐 또 어쩔 수 없었노라고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를 너를 찾아 고백하고도 싶었다 - 그것은 너나 나나의 가슴에서 못을 뽑아버리고자 하는 일 그러나 타이어에 박힌 못을 함부로 잡아 뽑아버리고서 알았다 빼는 그 순간 피식피식 바람이 새어나가 차는 주저앉고 만다 사는 일이 더러 그렇다 가슴팍에 대못 몇 개 박아둔 채 정비소로 가든지 폐차장으로 가든지 갈 데까지는 가야 하는 것 치유를 꿈꾸지 않는 것 꿈꾼대로 결국 치유되지 않을 것이므로 대못이 살이 되도록 대못을 끌어안는 것 때론 대못이 대못 같은 것이 생이 새어나가지 않게 그러쥐고 있기도 하는 것이다 - 타이어의 못을 뽑고 / 복효근 마음이 보이는 거울이 있다면 어떨까? 상처투성이의 마음을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어떨까? 마음이 보이..

시읽는기쁨 2012.12.10

박새에게 세들다 / 복효근

감나무 뒤 가까운 담벼락 돌틈 사이 박새 부부 둥지를 틀었나 보다 3월도 중순 너머 그런가보다 하기로 했다 안방에 둥지를 트는 것도 아니어서 새소리 몇 가락으로 세를 받기로 하고 새끼 깔 그동안만 전세 내주지 담벼락 앞 감나무 사이 나무 하나 더 심으려 무심코 정말 무심코 오늘 구덩이 하나 파려는데 갑자기 박새 부부 내 앞을 달겨든다 네 집이기도 하지만 내 집이기도 하다 점유권을 주장한다 아차차 그동안 몇 조각 새소리 미리 받아 들었던 게 죄로구나 엉겹결에 구덩이를 포기하고 나무 심기를 포기하고 이 봄을 저 박새 부부에게 맡기기로 하는데 저 부부 정말 전세 등기라도 한 모양 당당해서 아무 말 못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집 나무란 나무 제 식탁으로 대숲 그늘은 제 주방으로 저 하늘 구름은 제 신혼이불로 내 안..

시읽는기쁨 2012.09.27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 복효근

새들이 겨울 응달에 제 심장만 한 난로를 지핀다 두 마리 서너 마리 때로는 떼로 몰리다 보니 새의 난로는 사뭇 따습다 저 새들이 하는 일이란 너무 깊이 잠들어서 꽃눈 잎눈 만드는 것을 잊거나 두레박질을 게을리 하는 나무를 흔들어 깨우는 일, 너무 추워서 웅크리다가 눈꽃 얼음꽃이 제 꽃인 줄 알고 제 꽃의 향기와 색깔을 잊는 일 없도록 나무들의 잠속에 때맞춰 새소리를 섞어주는 일, 얼어붙은 것들의 이마를 한번씩 콕콕 부리로 건드려주는 일, 고드름 맺힌 나무들의 손목을 한번씩 잡아주는 일, 그래서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천지의 나뭇가지가 대들보며 서까래다 그러니 어디에 상량문을 쓰고 어디에 문패를 걸겠는가 순례지에서 만난 수녀들이 부르는 서로의 세례명처럼 새들은 서로의 소리가 제 둥지다 저 소리의 둥지..

시읽는기쁨 2011.02.27

용담

용담은 늦가을 막바지까지 산야를 지키는 꽃이다. 노란 감국이 진 자리에 푸른 용담은수줍은 듯 피어 있다. 용담의 하늘빛 색깔은 은은하면서 신비하다. 통꽃인데 가운데는 크고 깊은 구멍이 뚫려 있다. 웜홀처럼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비밀의 입구 같다. ‘용의 쓸개’라는 뜻의 용담(龍膽)은 맛이 무척 써서 생긴 이름이다. 뿌리는 항암효과가 있어 약초로 쓰인다. 용담의 꽃말은 ‘당신의 슬픈 모습이 아름답다’ ‘당신이 슬플 때 사랑한다’라고 한다. 푸른색이 슬픔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 꽃말을 제목으로 한 시가 한 편 있다. 내가 꽃 피는 일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꽃은 피어 무엇하리 당신이 기쁨에 넘쳐 온 누리 햇살에 둘리어 있을 때 나는 꽃 피어 또 무엇하리 또한 내 그대를 사랑한다 함은 당신의 ..

꽃들의향기 2010.11.19

상처에 대하여 / 복효근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 상처에 대하여 / 복효근 상처를 얘기하는 복 시인의 시 중에 ‘탱자’가 있다. 밖으로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난 가시로 인해 찔리고 상처받으며 살아내고 있는 탱자를 그리고 있는 시다. 탱자의 살갗은 제 가시로 저를 찔러대고 할퀸 수많은 상처투성이다. 스스로를 찌르는 자해의 가시로 인해 노랗게 익은 탱자는 더 향기..

시읽는기쁨 2010.06.15

홀딱 벗고

그저께 천마산에 갔을 때 숲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옆의 동행이그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하나는 벙어리뻐꾸기였고, 다른 하나는 검은등뻐꾸기였는데,우리가 보통 '홀딱벗고새'라고 부르는 새의 정식 이름이 검은등뻐꾸기라고 한다. '코 코 코 코'하며 네 음절로 노래하는데 그 소리에 '홀 딱 벗 고'를 대응시키니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새소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들린다고 하니까 다른 말로 대치시켜도 안 될 법은 없지만, 처음 '홀딱벗고'를 연상한 사람의 재치가 고마워서라도 그대로 불러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강원도에서는 아예 검은등뻐꾸기를 홀딱새로 부른다고 한다. 느낌으로는 홀딱새가 훨씬 더 친근감이 든다. 그런데 우리 같은 속인들이야 '홀딱벗고'라는 새소리에 엉큼한 연상을 하지만 스님들은 다른가 ..

길위의단상 2009.05.07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 / 복효근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나 -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 / 복효근 맑고 아름답다. 착하고 고운 사람이라면 이런 사랑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사랑이 이같을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자취 없이, 집착 없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사랑이 그리워 노래하는지도 모른다. 그대가 보고 싶어 하얗게 밤을 새워야 하고, 그대 이름을 부르며 바닷가를 걸어야 한다. 그래서 당신이 털어내기도 전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없다.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고 믿는다. 그..

시읽는기쁨 2008.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