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23

감사하며 오른 백마산

아내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요 몇 년간 산행이라면 엄두를 못 냈는데 꾸준한 치료와 트레이닝으로 다시 도전하게까지 되었다. 몸 상태를 체크할 겸 같이 백마산 등산에 나섰다. 무리가 되면 되돌아오려 했으나 예상외로 가뿐했다. 도리어 내가 뒤따라가기 바빴다. 아내는 하루도 빼지 않고 뒷산에서 맨발 걷기를 하고 있다. 하루 운동량이 내 열 배는 될 것이다. 이러다가는 체력이 역전될지 모르겠다. 몸은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나타난다는 걸 아내가 증명해 보이고 있다.  백마산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백마산은 500m가 채 안 되는 낮은 산이지만 그럴지라도 부부가 같이 산행을 할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중년 부부는 가끔 만나지만 우리처럼 7학년 부부는 드물다.   내려오는 길에는 종교 문제로..

사진속일상 2024.10.21

사랑방 / 함순례

울 아부지 서른, 울 엄니 스물 셋 꽃아씨, 아부지 투덕한 살집만 믿고 신접살림 차렸다는디, 기둥 세우고, 짚과 흙 찰박찰박 벽 다져, 오로지 두 양반 손으로 집칸 올렸다는디, 부쳐먹을 땅뙈기가 없는 기라 내사 남아도는 게 힘이여 붉은 동빛 박지르며 집을 나서면, 이윽이윽 해가 지고, 어둠별 묻히고야 삽작을 밀고 들어섰다는디, 한 해 두 해 불어나는 전답, 울 엄니 아부지 얼굴만 봐도 배가 불렀다는디.... 늘어나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울 엄니 이태가 멀다 실제 배가 불렀다는디, 갈이질에, 새끼들 가동질에, 하루 해가 지는지 가는지 하 정신 없었다는디, 울 아부지 저녁밥 안치는 엄니 그대로 부엌바닥에 자빠뜨린 거라 그 징헌 꽃이 셋째 딸년 나였더란다 첫국밥 수저질이 느슨할 밖에.... 임자 암 걱정 말어..

시읽는기쁨 2023.06.24

완벽한 타인

개봉한 지 벌써 2년 반이나 지난 영화다. 그때 지인한테서 재미있는 영화라고 추천받았는데 극장에 가지는 못했고, 느지막이 넷플릭스를 통해 봤다. 고향 친구 넷이 부부동반으로 집들이 모임을 갖는다. 한 사람의 제안으로 각자의 휴대폰을 테이블 중앙에 내놓고 연락 오는 내용을 모두 공개하기로 한다. 서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나 할 것 없이 감추고 싶은 비밀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믿을 놈 하나 없다'는 걸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서로의 관계는 파탄 나기 시작한다. 인간은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고 응큼하다. 만약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면 대부분의 인간 관계는 파국을 맞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가면을 쓰고 산다. '완벽한 타인'은 그런 인간의 본질을 코믹하게 잘 드러내 주는 영화다. 흔히 부부를 일심..

읽고본느낌 2021.03.12

눈뜬장님 / 오탁번

연애할 때는 예쁜 것만 보였다 결혼한 뒤에는 예쁜 것 미운 것 반반씩 보였다 10년 20년 되니 예쁜 것은 잘 안 보였다 30년 40년 지나니 미운 것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눈뜬장님이 됐다 아내는 해가 갈수록 눈이 점점 밝아지나 보다 지난날이 빤히 보이는지 그 옛날 내 구린 짓 죄다 까발리며 옴짝달짝 못하게 한다 눈뜬장님 노약자한테 그러면 못써! - 눈뜬장님 / 오탁번 여자의 기억법은 특이하다. 과거의 서운했던 일은 기막히게 기억해 낸다. 둘 사이에 냉기류가 흐를 때면 어두운 창고 문이 저절로 열리나 보다. 아내의 넋두리를 들어보면 나는 무지 나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한때는 정면 대응을 했지만 이젠 흘려 넘길 수밖에 없다. 창고를 채울 자물쇠가 없다는 걸 늦게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바라건대 아내도 눈뜬..

시읽는기쁨 2021.03.09

결혼 이야기

이번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여러 차례 호명된 영화다. 작품상,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극본상 후보에 올랐으나, 변호사 역을 맡은 로라 던만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스칼렛 요한슨이 여우주연상을 받았어도 마땅한 영화다. '결혼 이야기'는 결혼보다는 이혼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연극 연출가와 배우인 찰리와 니콜은 여덟 살의 아들 헨리를 두고 있는 부부다. 작은 일에서 갈등을 겪다가 결국은 헤어지기로 한다. 처음에는 변호사를 쓰지 않고 대화로 마무리 지으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니콜이 이혼 전문 변호사를 만나면서 상황이 급변하고 난장판이 된다. 어쩌면 이 영화는 미국의 이혼 사법 절차에 대한 고발인지 모른다. 둘은 이혼을 결심하고도 사이가 좋다. 왜 이혼하려는 건지 의아하기까지 하다. 흔히 ..

읽고본느낌 2020.02.26

힘이 있어야 싸우지

평생을 싸움 한 번 안 하고 살아온 부부도 있다지만 우리는 자주 티격태격한다. 그나마 젊을 때보다는 다투는 빈도나 강도가 줄어들었다. 퇴직을 했으니 얼굴 맞대고 살아가는 시간이 늘어났는데 이만만 해도 다행이지 싶다. 애정이 없으면 다툴 일도 없지 않은가. 아직 얼굴 쳐다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다. 다투는 원인은 주로 내 버럭, 하는 성질 때문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큰소리부터 치니 서로 목소리가 높아진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순간적으로 화가 불같이 일어난다.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잠시면 족하다. 큰소리치는 사람이 이긴다고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반대다. 꼬리를 내리는 건 늘 내가 먼저다. 화도 잘 내고 용서도 쉽게 구한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뒤끝이 없어진 게 과거와 달라진 점이다...

길위의단상 2019.11.11

팔랑귀와 불신지옥

아내는 남의 말을 쉽게 믿는다. 방송에 나오는 내용도 거의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TV는 온갖 건강과 의학 정보를 전한다. 몸에 좋은 약이나 음식이 있다고 하면 금방 솔깃해지는 모양이다. 아무 관심 없는 나까지 끌어들일 때가 많다. 내가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우리 집은 건강식품점을 차려도 될 것이다. 아내는 보이스 피싱에 걸려들기 쉬운 타입이다. 실제로 돈을 뺏기기 일보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2천만 원을 갖다 바치지 않은 것은 순전히 휴대폰 배터리 덕분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배터리가 방전되어 사기범과 휴대폰 연결이 끊어졌다. 안절부절못하다가 아내는 제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한다. 나는 아내가 홈쇼핑 방송을 보는 게 제일 무섭다. 나도 유혹을 받을 때가 있는데 아내는 오죽하겠는가. 까짓..

길위의단상 2019.08.05

별침을 권함

자식과 같이 살았을 때는 방의 여유가 없어 부부는 한방을 써야 했다. 남편이 코를 골아도, 아내가 잠꼬대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젊었을 때는 쉽게 잠이 드니 별문제가 안 되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잠귀가 밝아지고 예민해진다. 마침 그때쯤이면 자식이 출가하게 되고 빈방이 생기니 부부는 서로 편하게 딴 방을 쓰는 경우가 흔하다. 아마 많은 가정이 그럴 것이다. 부부는 마땅히 한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고 초지일관 고집을 부리는 친구가 있지만 별 호응을 얻지는 못한다. 우리 부부도 각방을 쓰기 시작한 게 3년 정도 되었다. 잠을 잘 못 드는 아내는 전에도 거실이나 빈방에서 혼자 자는 경우가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그 빈도가 점점 잦아졌다. 자식이 결혼하고 자연스레 방이 비면서 방 하나는 아내의 침실이 되었..

길위의단상 2018.10.27

부부 여행

친구 A가 이렇게 투덜댄 적이 있다. "마누라와 다시는 같이 여행 가지 않을 거야!" 부부가 함께 유럽 여행을 하고 온 뒤에 한 말이다. 줄곧 티격태격하느라 볼썽사나운 여행이 되었다고 한다. 부부가 함께하는 여행에서 자주 있는 일이다. 여행하게 되면 하루 24시간 내내 붙어 있어야 한다. 부딪힐 일이 자주 생긴다. 더구나 패키지여행은 일정이 빠듯해서 몸은 피곤하고 짜증이 난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말다툼이 생긴다. 그래서 배우자보다는 친구가 편하고 좋다. 친구는 사소한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여행은 따로따로 다니는 부부가 많은 이유다. 그러나 반대인 경우도 가끔 있다. 늘 부부가 함께 해외여행을 나가는 친구 B가 있다. 한두 달씩 있다 오기도 한다. "넌 안 싸우니?" 물어보면, "왜 싸울 일이 생기는 ..

길위의단상 2018.03.27

오래된 농담 / 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 평 받으려고 언덕길을 오르던 늙은 아내가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합환수 가지 끝을 보다 신혼의 첫밤을 기억해낸 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그늘보다 몇 평이나 뚱뚱해져선 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다 그럼, 무겁지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무거울 수밖에 굵은 주름이 나이테보다 깊어 보였다 굴참나무 열매 몇 되 얻으려고 언덕길을 오르던 늙은 남편이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 열매 가득한 나무 끝을 보다 자식농사 풍성하던 그날을 기억해낸 늙은 아내가 마지못해 업는다 나무 열매보다 몇 알이나 작아져선 나, 생각보다 가볍지? 한다 머리는 비었지 허파엔 바람 들어갔지 양심없지 그러니 가벼울 수밖에 두 눈이 바람 잘 날 없는 가지처럼 더 흔들..

시읽는기쁨 2017.12.11

금성인의 지극함

첫째 손주는 여자지만, 둘째 손주는 남자다. 커가는 모습을 보면 둘의 차이가 엄청나다. 아예 다른 종족이 아닌가 싶다. 여자와 남자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져 나오는 게 맞는 것 같다. 뇌 구조 자체가 다르다. 둘째는 걸음마를 할 때부터 길가의 돌멩이와 막대기에 관심을 보였다.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잡고 던지고 하는 게 일이었다. 지금은 나뭇가지만 잡으면 칼싸움을 하려고 덤벼든다. 돌멩이도 원시 시대의 무기였다. 수컷의 피에 흐르는 사냥과 전투 유전자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사내아이가 왜 돌멩이와 막대기에 본능적인 호기심을 가지는지 이제야 알겠다. 반면에 첫째는 이런 데는 아예 흥미가 없다. 성인이 된 여자와 남자가 부부가 되어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게 얼마나 어..

길위의단상 2016.12.23

여보라는 말 / 윤석정

연애시절, 나는 은근슬쩍 당신에게 여보라고 불러봐 했더니 그 말이 어색했던 당신은 여보를 거꾸로 바꿔서 보여? 라고 묻고는 딴청을 피웠다 나는 느닷없는 물음에 당황스럽기만 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당신은 나지막하게 사랑해라고 했다 결혼을 앞두고 사소한 이유로 다투던 날 당신은 내가 되어도 내가 아니 되어도 괜찮다고 했는데 나는 먹먹해져서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구도 아니 된다고 당신이어야만 한다고 소리쳤다 당신은 내 마음이 보여? 라고 묻고는 뒤돌아섰다 나는 눈을 감고 사랑해라고 속으로 속으로 되뇌었다 당신은 이 세상 기꺼이 나와 함께 살겠다고 했다 깜깜한 나에게 전부를 보여준 당신 당신은 겨울 꽃처럼 단아한 신부가 되었고 나는 잘 보이지 않는 어둔 세상에 살지라도 당신이 내민 손을 꼬옥 붙잡고 가겠다..

시읽는기쁨 2016.08.21

철수와 영희 / 윤제림

철수와 영희가 손 붙잡고 간다 철수는 회색 모자를 썼고, 영희는 빨간 조끼를 입었다 바둑이는 보이지 않는다 분수대 앞에서 맨손체조를 하고 있는 창식이 앞을 지날 때 영희가 철수의 팔짱을 낀다 창식이는 철수가 부럽다 철수와 영희가 벤치에 앉아 가져온 김밥을 먹는다 철수가 자꾸 흘리니까 영희가 엄마처럼 철수의 입에 김밥을 넣어준다 공원 매점 파라솔 그늘 아래 우유를 마시던 숙자가 철수와 영희를 바라본다 숙자는 영희가 부럽다 일흔두엇쯤 됐을까 철수와 영희는 동갑내기일 것 같고 창식은 좀 아래로 보인다 물론, 철수와 영희는 부부다 - 철수와 영희 / 윤제림 세월은 모든 것을 낡고 시들게 한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누구나 철수와 영희로 되어 간다. 부럽게 바라보는 창식이와 숙자도 있다. 늙으면 다 어린이로 돌..

시읽는기쁨 2014.09.20

행복한 부부

어느 분의 블로그에서 자신의 행복한 가정을 소개하는 글을 읽었다. 결혼 3년차라는데 요즘에 이런 젊은이들도 있구나, 무척 경이로웠다. 참 건실한 선남선녀라고 생각하기에 내용을 소개한다. 행복한 부부의 7가지 비밀 1. 부부끼리 존댓말을 쓴다. 우리 부부는 존댓말을 쓴다. 연애 때부터 서로 존댓말을 써왔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존댓말을 쓴다는 것은 서로를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고, 서로 말다툼을 하더라도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화가 났을 때는 반말을 종종 하기도 하는데, 만약 평소에 반말을 했더라면 싸울 때는 더 험한 말이 오고가지 않았을까? - 나도 아내와 존댓말을 쓰고 싶은데 아직까지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몇 번 노력해 보았지만 이젠 포기 단계, 이 젊은 부부가 정말..

참살이의꿈 2014.07.03

가장 짧은 시 / 서정홍

아랫집 현동 할아버지는 몇 해째 중풍으로 누워 계신 할머니를 혼자 돌보십니다. 밥도 떠먹여 드려야 하고, 똥오줌도 혼자 눌 수 없는 할머니를 힘들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으시고..... 요양원에 보내면 서로 편안할 텐데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이웃들이 물으면, 딱 한 말씀 하십니다. "누 보고 시집왔는데!" - 가장 짧은 시 / 서정홍 고향 마을에 계신 어르신들도 대부분 몸이 불편하시다. 중노동이 몸을 망가뜨린 것이다. 주변에 제일 많이 생기는 게 노인 요양원이다. 거동이 불편해지면 어쩔 수 없이 현대판 고려장이라는 요양원에 들어간다. 자식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부부가 같이 사는 집은 어느 한쪽이 쓰러지기 전까지는 끝까지 버텨내는 걸 본다. 이 시에 나오는 현동 할아버지도 그렇다. 시(詩)가 멀리..

시읽는기쁨 2014.06.25

산등성이 / 고영민

팔순의 부모님이 또 부부싸움을 한다. 발단이 어찌 됐든 한밤중, 아버지는 장롱에서 가끔 大小事가 있을 때 차려입던 양복을 꺼내 입는다. 내 저 답답한 할망구랑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죄 없는 방문만 걷어차고 나간다. 나는 아버지께 매달려 나가시더라도 날이 밝은 내일 아침에 나가시라 달랜다. 대문을 밀치고 걸어나가는 칠흙의 어둠 속, 버스가 이미 끊긴 시골마을의 한밤, 아버지는 이참에 아예 단단히 갈라서겠다며 갈 데까지 아주 멀리 가보겠노라 큰소리다. 나는 싸늘히 등 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어머니를 다독여 좀 잡으시라고 하니, 그냥 둬라, 내가 열일곱에 시집와서 팔십 평생 네 아버지 집 나간다고 큰소리치고는 저기 저, 등성이를 넘는 것을 못 봤다. 어둠 속 한참을 쫓아 내달린다. 저만치 보이는 구부정한 ..

시읽는기쁨 2013.08.09

공갈빵 / 손현숙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꽃구경하던 봄날, 우리 엄마 갑자기 내 손을 놓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걸음을 떼지 못하는 거야 저쯤 우리 아버지, 어떤 여자랑 팔짱 착, 끼고 마주오다가 우리하고 눈이 딱 마주친 거지 "현숙이 아버......" 엄마는 아버지를 급하게 불렀고, 아버지는 "뭐라카노, 아주마시! 나, 아요?" 바바리 자락 휘날리며 달아나버린 거지 먹먹하게 서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서러웠거든 우리가 대문 밀치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어디 갔다 인자 오노, 밥 도고!" 시침 딱 갈기고 큰소리쳤고 엄마는 웬일인지 신바람이 나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상을 차렸던 거야 우리 엄마 등..

시읽는기쁨 2012.09.21

아내의 전성시대 / 임보

왜 법대생들이 그렇게 좋아했던가 몰라요 고시공부 하는 놈들이 공부는 않고 쫓아다니기만 했으니 아내의 회고담이 또 시작된다 한두 놈이 아니었다고 은근히 으스대는 투다 '법대생'이라는 말도 내 비위에 거슬린다 지금쯤 잘된 놈은 변호사가 되어 떵떵거리며 지내지 않겠는가 (하기사 못 된 놈은 복덕방에서 어정거리고 있겠지만) 키는 180도 넘은 멀대같은 놈들이 늘 따라다녔단 말이요 키가 180이라는 말에 또 야코가 죽는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대꾸도 않고 숟가락질만 해댄다 수십 번을 들은 얘기이므로 다 알고 있는데 무슨 미련이 있는지 오늘도 점심을 먹다말고 어떤 친구 얘기 끝에 그녀는 자신의 황금시절을 회고하고 있는 중이다 매일 대문 밖에까지 따라와서 어정거리니 어쩌겄오? 다음엔 삼촌이 나와서 쫓아보냈다는 얘기..

시읽는기쁨 2012.09.01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나태주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저에게가 아니에요.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어요.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함께 약과 함께 산 여자예요.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삶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신발장에 구두도 많지 않은 여자구요. 한 남자 아내로서 그림자로 살았고 두 아이 엄마로서 울면서 기도하는 능력밖엔 없었던 여자이지요. 자기의 이름으로 꽃밭 한 평 채전밭 한 뙈기 가지지 않은 여자예요. 남편 되는 사람이 운전조차 할 줄 모르고 쑥맥이라서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여자예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저의 아내 되는 사람에게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시어요. -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나태주..

시읽는기쁨 2010.04.02

부부 / 문정희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꽃 만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하고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 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

시읽는기쁨 2009.02.23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 남편 / 문정희 어느 모임에서 50대 중반을 넘긴 그녀가 말했다. 자신이 갱년기를 거치면서 성욕을 비롯한 이런저런 욕망들에서 벗어날 수 있어 좋았다고, 그 중에는 남편에 대한 기대감도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전에는 남편이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

시읽는기쁨 2008.11.03

접기로 한다 / 박영희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 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 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 햇살에 배겨 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 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 접기로 한다 / 박영희 사람에게 서운할 때는 이렇게 속으로 뇌어보라고 한다. "그 사람도 무슨 사정이 있겠지..." 서운한 것이 어디 사람만이랴. 살다 보면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세상이 원망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 사람..

시읽는기쁨 2006.12.23

미워도 다시 한 번

나이가 들수록 부부싸움을 하는 빈도가 줄어들고 강도 또한 약해진다. 세월의 강물이 모난 부분을 깎아내어 부드럽게 만들기 때문이다.또 나이가 들수록 생활이나 생각이 단순해지는 탓이기도 하다. 젊었을 때는 여러 면에서 성격이나 생각 차이로 다투게 된다. 어쩌면 그런 것이 당연하기도 하다. 우리 같은 경우는 부모님 관계로 제일 많이 티격태격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크면서는 자식 때문에 자주 다투게 되었다. 두 입장 사이의 균형점을 찾기는 매우 힘들고 대개 어느 한 쪽이 포기하는 입장이 되어야 사태가 해결된다. 교육 문제에서는 나는 내 방식대로 할 수가 없었다. 요사이는 서로간의 가치관 차이 때문에 가끔 고성이 나올 때가 있다.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지만 결국은 서로의 생각을 인정해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해..

길위의단상 2006.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