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 8

11월의 마지막 날

10월의 마지막 날은 떠나가는 옛 사랑이 뒤돌아보며 보이는 씁쓸한 미소라면, 11월의 마지막 날은 미련 없이 돌아서는 옛 사랑의 뒷모습이다. 11월은 이 계절만이 가지는 쓸쓸한 아름다움이 있다. 주변은 떠나가는 것들의 따스한 송별사로 가득하다. 애잔한 여운을 남기는 11월의 쓸쓸함이 좋다. 음식이 오래 씹을 수록 단맛이 나듯 쓸쓸함도 그러하다. 한 장 남은 달력의 아쉬움도, 쓸쓸함과 다불어 함께 즐길 일이다. 11월의 마지막 날, 여주의 한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카페라떼, 목련차, 셋이 마주보며 앉다. 인생이라는 길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을 생각한다. 깊은 허공 같은 무상(無常)을 생각한다.

사진속일상 2019.11.30

밤골과의 인연

나에게는 세 가지 마음의 짐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밤골이다. 끝맺음을 잘하고 나오지 못해서 밤골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꿈에 밤골이 나타나면 대개가 악몽인데, 늘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면서 비명을 지르게 된다. 그곳을 떠난 지 12년이 되었다. 만날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는 옛말이 있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지만, 쉽사리 버리기 어려운 인연도 있다. '유연천리래상회(有緣千里來相會), 무연대면불상봉(無緣對面不相逢)' - 인연이 있으면 천 리를 떨어져도 서로 만나고, 인연이 없으면 얼굴을 맞대고 있어도 만나지 못한다. 오늘, 언젠가는 매듭을 풀어야 할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아니,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지 모른다. 우연이 무수히 겹쳐지면 필연이 된다. 그래서 언젠가는 만나야 할 사람이다...

사진속일상 2019.04.27

정원사의 방울

위고의 2권에는 파리에 있는 봉쇄 수녀원 얘기가 나온다. 장발장이 자베르 형사를 피해 은신한 곳이다. 봉쇄 수녀원은 '봉쇄'라는 이름 그대로 외부와 단절된 곳이다. 더구나 남자는 절대 접근 금지 구역이다. 그래도 수녀원을 운영하자면 남자의 힘을 빌려야 할 때가 있다. 이 봉쇄 수녀원에는 정원사와 잡일을 겸하는 유일한 남자가 산다. 포슐르방이라는 노인으로 절름발이다. 장발장은 전에 포슐르방의 생명을 구해준 인연으로 그의 도움을 받아 수녀원에 피신할 수 있었다. 정원사 노인은 발목에 방울을 달고 있다. 그가 움직이면 방울 소리가 난다. 수녀들은 방울 소리가 나면 얼른 숨는다. 정원사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다. 남자와 만나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정원사의 방울은 '내가 여기 있으니 피하시오' ..

참살이의꿈 2019.01.31

누군가 슬퍼할 때 / 김현옥

친구의 눈에 눈물이 흐를 때 함께 울게 하소서 친구의 가슴이 고통으로 멍들 때 연민을 느끼며 그를 껴안을 수 있게 하소서 가난한 이웃의 어려움을 들을 때 모르는 척하지 않고 그의 궁핍함을 함께 걱정하고 그의 불안한 삶의 고뇌를 나누며 주머니를 털어 그와 나눌 수 있는 진실함을 주소서 무언가 사회가 잘못되어 가고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탓을 돌리거나 남들이 해결하리라 미루지 않고 저도 무언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며 함께 올바른 길로 나가기 위해 기꺼이 끼어들게 하소서 주님의 자녀인 제가 말만 앞선다는 소리를 들어 당신께 누가 되지 않도록 살아 있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 누군가 슬퍼할 때 / 김현옥 수녀님, 어떻게 지내시나요? 마지막 통화하고 나서 벌써 4년이나 흘렀네요. 지금도 수녀님이라 불러야 ..

시읽는기쁨 2014.02.15

해미에 다녀오다

수녀님을 모시고 아내와 함께 해미에 다녀왔다. 해미성지(海美聖地)에 가는 게 목적이었지만 해미읍성과 개심사도 들러보는 봄소풍이 되었다. 어제 내린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몹시 센 날씨였다. 해미 지역은 거의 10년 만에 다시 찾아간 셈이다. 전보다 모든 곳이 깔끔하게단장되어 있었다. 읍성 안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도 노란 유채꽃밭이 인상적이었다. 박해 시대 때 이곳 해미에서만 1천 명 가까운신자들이 순교를 했다. 산 채로 둠벙에 밀어넣고는생매장을 했다. 그런 비극의 현장에 해미성지가 위치하고있다. 십자가의 길 14처를 돌았다. 이곳을 '여숫골'이라 부르는 것은 '예수 마리아'라고 하는 신자들의 기도 소리를 '여수 머리'라고 잘못 알아들은 주민들에 의해 그대로 지명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렇고 말고. 기쁜..

사진속일상 2012.04.26

네 잎 클로버

밤골에서 D 수녀님이 크리스마스 카드와 함께 네 잎 클로버를 보내주셨다. 부서질 듯 바싹 마른 클로버를 조심스레 손 위에 올려놓고 바라본다. 클로버 잎에서 생긴 점이 점점 커지더니 넓은 화면으로 변하고옛날 밤골에서의 풍경이 열린다. 그때.... 수녀원 잔디밭에는 토끼풀이 많이 자랐다. 특히 성모상 옆에서는 네 잎 클로버가 자주 눈에 띄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한두 개 쯤은 어렵지 않게찾을 수 있었다. 미사 시간이나 또는 수녀님을 기다릴 때면 심심풀이로 잔디밭에 쪼그려 앉곤 했다. 그때 그곳에는 행운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따뜻한 봄날이었다. 10년 전 어느 겨울, 비포장 산길을 따라 어렵게 찾아간 밤골과는 그렇게 인연이 맺어졌다. 첫눈에 반했고, 한 순간에 그곳은 내 이상향이 되었다. 적막 속에서..

참살이의꿈 2009.12.31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녀님, 그간 소식이 뜸했네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옛말이 있지만 프란체스카 편으로 듣는 소식은 그렇지도 않은 듯해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함을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 코가 석자라고도 하잖아요. 자신도 헤매는 주제에 다른 이에게까지 신경 쓰기에는 제 마음의 여력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책을 보내달라는 부탁은 진즉에 들었는데 앞의 논리로 변명을 삼겠습니다. 어제는 마음먹고 서점에 나가서 책 한 권을 골랐습니다. 정말 요사이는 뭐에 그리 쫓기는지 서점 출입한 지도 오래되었답니다. 책 볼 마음의 여유도 없구요. 언젠가 수녀님과 목아박물관에 갔을 때가 떠오르네요. 그때 뜰에 있는 돌에 새겨져있던 ‘보왕삼매론’을 같이 읽던 기억이 나시는지요.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

길위의단상 2007.03.27

묵주

터에 찾아온 J 수녀님에게서 묵주를 선물 받았다. 돌아가신 언니 수녀님이 사용하셨던 묵주인데, 수녀님이 보관하고 계시다가 기도를 많이 하라면서 내 손에 건네 주셨다. 아마 최근에 침체된 내 상태를 전해 들으시고 자극을 주시려는 것 같다. 묵주는 황색의 묵주알에 나무 십자가가 달려있는 작고 소박한 것이다. 손때가 묻고 닳아있는 것이 오랜 기간 수녀님의 기도와 함께 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몇 년 전에는 T 수녀님으로부터도 사용하던 묵주를 받은 적이 있다. 그 묵주는 전부 나무로 된 것이었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사용했는지 십자가의 귀퉁이는 닳아 없어지고 나무 색깔도 까맣게 변해 있었다. 기도가 생활화된 수녀님들이지만 이 정도까지 되자면 보통 세월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분신처럼 묵주가..

사진속일상 2004.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