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27

열심히 산다는 것 / 안도현

산서에서 오수까지 어른 군내버스비는 400원입니다 운전사가 모르겠지, 하고 백원짜리 동전 세 개하고 십원짜리 동전 일곱 개만 회수권함에다 차르륵 슬쩍, 넣은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걸 알고 귀때기 새파랗게 젊은 운전사가 있는 욕 없는 욕 다 모아 할머니를 향해 쏟아붓기 시작합니다 무슨 큰 일 난 것 같습니다 30원 때문에 미리 타고 있는 손님들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운전사의 훈계 준엄합니다 그러면, 전에는 370원이었다고 할머니의 응수도 만만찮습니다 그건 육이오 때 요금이야 할망구야, 하면 육이오 때 나기나 했냐, 소리치고 오수에 도착할 때까지 훈계하면, 응수하고 훈계하면, 응수하고 됐습니다 오수까지 다 왔으니 운전사도, 할머니도, 나도, 다 왔으니 모두 열심히 살았으니! - 열심히 산다는 것 / 안도현 인간..

시읽는기쁨 2022.12.31

화암사와 대둔산

전주에 다녀오는 길에 완주를 지나다가 우연히 화암사(花巖寺)로 들어가는 안내 간판을 보았다. 안도현 시인이 찬탄한 바로 그 '잘 늙은 절, 화암사'라는 생각이 떠올라 핸들을 돌려 화살표를 따라 찾아갔다.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이런 기회가 마중 오기도 하는구나. 시인의 글을 다시 찾아 읽어본다. 잘 늙은 절, 화암사 / 안도현 절을 두고 잘 늙었다고 함부로 입을 놀려도 혼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나라의 절 치고 사실 잘 늙지 않은 절이 없으니 무슨 수로 절을 형용하겠는가. 심지어 잘 늙지 않으면 절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심사도 무의식 한쪽에 풍경처럼 매달려 있는 까닭에 어쩔 수가 없다. 잘 늘었다는 것은 비바람 속에서도 비뚤어지지 않고 꼿꼿하다는 뜻이며, 그 스스로 역사이거나 문화의 일부로서 지..

사진속일상 2020.10.21

가을의 소원 / 안도현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 가을의 소원 / 안도현 자리에서 일어나면 싸늘한 기운이 적당히 기분 좋다. 자동으로 창문을 열던 손길도 멈추었다. 창 곁에 다가와 있던 안개가 천천히 물러가고 있다. 그 빈 자리를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채우기 시작하는 아침이다. 시인을 따라 내 가을의 소원은 뭐가 있을까를 들여다본다. '소원 없음'으로 소원을 삼는 게 제일 낫지 않을까, 라는 건방진 생각도 해 본다. 쉼 없이 생기고 사라지는 가운데 자연은 그대로 여여(如如)하거늘...

시읽는기쁨 2020.09.28

그런 일

지난 정권에서 절필을 선언했던 안도현 시인이 다시 시를 쓰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무척 반갑다. 그러나 절필 기간 중에도 산문집은 여러 권 나왔다. 이 책도 그 중 한 권인데 새로 쓴 글보다는 예전 것을 모은 게 많다. 신선한 맛이 떨어진다. 책을 내는 것도 좋지만 담긴 내용도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이젠 시인의 나이에 걸맞는 사유의 깊이를 보게 되길 바란다. 시인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기대다. 나로서는 를 쓸 시절의 작품이 참 좋았다. 전교조 운동으로 해직되고 어려운 시기를 보낸 뒤 시골 학교로 다시 복직된 때로 알고 있다. 지명도가 높아지면서 너무 과작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눈길이 오래 머무는 한 줄의 문장이 있다. 에 실린 '시작 노트'의 일부다. "시인..

읽고본느낌 2017.05.13

백석 평전

안도현 시인이 쓴 백석 평전이다. 안 시인이 제일 존경하는 백석의 생애가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그려져 있다.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시인의 감칠맛 나는 글솜씨가 백석이라는 인물을 새롭게 재구성했다. 특히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백석이 남긴 작품을 중심으로 되살린 건 의미 있다. 책이 쉽게 재미있게 읽혀 좋다. 백석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부분적으로 알던 백석의 일생을 전체적으로 조감하게 되었다. 결벽증이 있는 모던 보이 백석은 새롭게 알게 되었다. 전화기는 남 손이 닿았다고 손수건으로 싸서 잡고, 악수한 뒤에는 비누로 씻을 정도로 깔끔했다. 남이 만진 물건에는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멋을 부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몇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양..

읽고본느낌 2015.01.18

새해 기도

나이가 드니 새해의 설렘도 줄어든다. 해가 바뀌어도 달라질 건 크게 없다는 걸 삶으로 체험해 왔기 때문이다. 수많은 새해의 각오나 기도가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물거품처럼 사라져갔다. 불꽃놀이는 짧고, 뒤에는 여일한 일상이 있을 뿐이다. '복'이나 '행복'이 너무 남발되는 신년의 분위기가 별로 탐탁치 않다. 그래도 어젯밤에는 열두 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TV로나마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결국 한 해가 가기는 갔구나, 라는 느낌에 뭉클해졌다. 작년은 우리 가정에서 파란만장했던 한 해였다. 그만큼 노심초사하며 보낸 해도 없었다. 다시 되살려보기도 싫어서 한 해의 감상을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세월의 매듭이 있다는 게 고맙다. 달력을 새로 걸며 힘든 과거가 끊어져 나갔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건 치유의 ..

길위의단상 2015.01.01

안도현의 발견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칼럼을 묶어 펴낸 책이다. 원고지 3.7매의 정해진 분량으로 호흡이 짧은 글이 모여 있다. '발견'이라는 이름은 시인은 발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데서 따왔다. 시인은 원래 있던 것 중에 남들이 미처 찾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이 책은 안 시인이 근래 발견한 것들을 드러낸 것이다. 시인이 좋아한다고 말한 것처럼 거대하고 높고 빛나는 것들보다는 작고 나지막하고 안쓰러운 것들의 이야기다. 안도현 시인의 글은 시나 산문이나 감칠맛이 난다. 입에 착착 감긴다. 시인은 선 가늘고 예민한 여성적 감성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 세상이나 사물을 보는 눈을 통해 나도 배우는 게 많았다. 시각을 달리 해서 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다. 보는 것도 훈련이다. 관습적인 ..

읽고본느낌 2014.11.03

모퉁이 / 안도현

모퉁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가 있겠어 비행기 활주로, 고속도로, 그리고 모든 막대기들과 모퉁이 없는 남자들만 있다면 뭐가 그립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계집애들의 고무줄 끊고 숨을 일도 없었겠지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을 테고 하굣길에 그 계집애네 집을 힐끔거리며 바라볼 일도 없었겠지 인생이 운동장처럼 막막했을 거야 모퉁이가 없다면 자전거 핸들을 어떻게 멋지게 꺾었겠어 너하고 어떻게 담벼락에서 키스할 수 있었겠어 예비군 훈련 가서 어떻게 맘대로 오줌을 내갈겼겠어 먼 훗날, 내가 너를 배반해 볼 꿈을 꾸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말이야 골목이 아냐 그리움이 모퉁이를 만든 거야 남자가 아냐 여자들이 모퉁이를 만든 거야 - 모퉁이 / 안도현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한 관찰의 중요성을..

시읽는기쁨 2014.11.02

안도현 시인을 가까이서

내가 좋아하는 안도현 시인이 우리 동네에 찾아왔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 시인을 초청해서 시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40명 정도가 모인 조촐한 모임이었는데, 이름난 시인이 동네 단위의 행사에까지 참석해 준 게 무척 고마웠다. 시와 글로 접해서 느낀 대로 조용하며 차분한 성격의 안 시인은 자신이 시인이 된 출발점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갔다. 원래는 화가가 될 생각이었는데 국어 선생님에게 혼이 난 후 좋은 시를 써서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문예반에 들어간 게 시인이 되는 계기였다고 해서 모두를 미소 짓게 했다. 시를 쓰는 데 제일 경계할 일이 진부한 표현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질문을 한 사람에게 시집 한 권씩을 선물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권을 ..

사진속일상 2014.11.01

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 스며드는 것 / 안도현 낚시꾼들이 손맛을 거리낌 없이 즐기는 건 물고기가 고통을 모를 것이라는 가정을 하기 때문이다. 바늘에 입이 꿰인 채 살려고 발버둥 치는 물고기의 비명을 듣는다면 차마 낚시를 취미로 하지는 못할 것이다. 동물은 말할 나위가 없고 식물도 감각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아직은 우리의 지식이 일천할 뿐,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

시읽는기쁨 2014.06.30

동해바다 / 신경림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작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 동해바다 / 신경림 타인에게는 엄격하면서 자신에게는 관대한 내 모습이 부끄럽다. 나이를 헛먹고 있다. 늙어가면서 제일 괴로운 게 옹졸해지는 나를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를 만나니 안도현의 '바다가 푸른 이유'라는 글이 생각난다. 스스로 채찍을 들 줄 모른다면 하느님의 매라도 기다려야 마땅하다. ..

시읽는기쁨 2014.02.27

삶이란 무엇인가

심란한 차에 읽게 된 책이다. 제목은 로 '안도현 아포리즘'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내용을 보니 안도현 씨가 쓴 여러 책에서 뽑은 글 모음집이다. 아포리즘(aphorism)이란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을 말한다. 새로운 내용이 없어서 실망스러웠는데 초판 7쇄까지 간 걸 보니 지은이의 이름 덕을 톡톡히 보는 것 같다. 글 중에서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데에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때가 때여선지 모르겠다. 삶이란 무엇인가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를 때 저기 저 고갯마루까지만 오르면 내리막길도 있다고 생각하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 보자, 자기 자신을 달래면서 스스로를 때리며 페달을 밟는 발목에 한 번 더 힘을 주는 것. 읽어도 읽어도 읽어야 할 책이 쌓..

읽고본느낌 2014.01.06

예천 태평추 / 안도현

어릴 적 예천 외갓집에서 겨울에만 먹던 태평추라는 음식이 있었다 객지를 떠돌면서 나는 태평추를 잊지 않았으나 때로 식당에서 메밀묵무침 같은 게 나오면 머리로 떠올려보기는 했으나 삼십 년이 넘도록 입에 대보지 못하였다 태평추는 채로 썬 묵에다 뜨끈한 멸치국물 육수를 붓고 볶은 돼지고기와 묵은지와 김가루와 깨소금을 얹어 숟가락으로 훌훌 떠먹는 음식인데 눈 많이 오는 추운 날 점심 때쯤 먹으면 더할 수 없이 맛이 좋았다 입가에 묻은 김가루를 혀끝으로 떼어먹으며 한번도 가보지 않은 바다며 갯내를 혼자 상상해본 것도 그 수더분하고 매끄러운 음식을 먹을 때였다 저 쌀쌀맞던 80년대에, 눈이 내리면, 저 눈발은 누구를 묶으려고 땅에 저리 오랏줄을 내리는가? 하고 붉은 적의의 눈으로 겨울을 보내던 때에, 나는 태평추가..

시읽는기쁨 2013.08.04

거짓말 / 예브게니 옙투셴코

아이들에게 거짓을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네 허위를 진실인 양 말하는 것도 잘못이지 아이들에게 천국에 하느님이 계시고 이 세상이 잘 굴러간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야 아이들은 자네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안다네. 아이들도 인간이거든 아이들에게 숱한 어려움에 대해 말해주게 앞으로 일어날 일만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도 분명히 보게 해 줘야 하네 살면서 맞닥뜨리게 될 장애와 난관에 대해 말해주게 마주치게 될 슬픔과 고통에 대해 말해주게 지옥 같은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려주게 행복의 대가를 아는 자만이 행복할 수 있지 않은가 잘못을 알면서도 용서해서는 안 되네 잘못을 알면서도 용서해서는 안 되네 그냥 두면 반복되고 늘어나 나중에 우리 학생들은 우리가 용서했다는 것을 용서하지 않을테니까 - 거짓말 /..

시읽는기쁨 2013.07.08

팔원(八院) / 백석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 팔원(八院) / 백석 동장군 기승이 대단하다. 지난 12월은 45년 만의 강추위였다. 새해가..

시읽는기쁨 2013.01.03

일기 / 안도현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 일기 / 안도현 고맙게도 지인으로부터 안도현 시인이 직접 서명한 시인의 근작 시집 을 선물 받았다. 시인이 서문에서 쓴 대로 '말과 문체를 갱신해 또다른 시적인 것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보이는 시집이다. 시인의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읽기 편하면서 가슴에 쉽게 감동이 닿았는데, 지금은 여러 가지를 이리..

시읽는기쁨 2012.11.11

가을의 전설 / 안도현

완주군 경천면 대아리 저수지 물가에 빈 배 한 척 한가로이 매여 있기에 그 배 빌려 타고 단풍놀이나 즐겨볼까 싶어서 주인네 집을 물어 물어 찾아갔더니 주인은 낮술에 취해 허리띠 풀어놓고 마루 위에 붉은 고추 멍석으로 누워 잠들었고 주인 아낙께서 고추를 매만지다 하시는 말씀 "대낮에 일도 없이 뭔 배를 탈라고 헌다요?" 그 말씀 한 마디에 화들짝 놀란 내 아내는 뒷걸음치다가 저만치서 막 불이 붙어서 그만 단풍나무 한 그루로 타올랐습니다 - 가을의 전설 / 안도현 '가을의 전설'이라고 하면 야구 팬은 한국시리즈를 떠올릴 것이다. 지금 삼성과 두산의 포스트 경기가 벌어지고 있는데 나도 재미있게 보고 있다. 4차전까지 늘 1점차로 승부가 갈려 아슬아슬했다. 그런데 영화 애호가라면 같은 제목의 영화를 연상할지 모..

시읽는기쁨 2010.10.13

나의 경제 / 안도현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만 원을 준다 전주까지 왔다 갔다 하려면 시내버스가 210원 곱하기 4에다 더하기 직행버스비 870원 곱하기 2에다 더하기 점심 짜장면 한 그릇값 1,800원 하면 좀 남는다 나는 남는 돈으로 무얼 할까 생각하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나의 경제야, 아주 나지막하게 불러본다 또 어떤 날은 차비 좀, 하면 오만 원도 준다 일주일 동안 써야 된다고 아내는 콩콩거리며 일찍 들어와요 하지만 나는 병천이형한테 그동안 술 얻어먹은 것 염치도 없고 하니 그런 날 저녁에는 소주에다 감자탕이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또 며칠 후에 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월말이라 세금 내고 뭐 내고 해서 천 원짜리 몇 뿐이라는데 사천 원을 받아들고 바지주머니 속에 짤랑거리는 동전이 얼..

시읽는기쁨 2008.12.19

걷기의 즐거움

가을을 걷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아무래도 여름과 겨울은 쾌적한 상태에서걷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 봄과 가을은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지만,그중에서도 가을은 걷는다는 행위의 정서적 측면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이 아닌가 싶다. 낙엽 떨어진 숲길이나 수확이 끝난 빈 들길을걷는 운치는가을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올 가을에는 무엇에 바빴는지 별로 걷지를 못했다. 는 한 번밖에 못했고, 기억에 남을 만한 걷기 여행도 없었다. 벌써 가을의 끝자락에 이르니 무척 아쉽게 느껴진다. 11 월에 든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하순을 향하고 있다. 이번 주말이 절기로 벌써 소설(小雪)이란다. 곧 첫눈을 만날 것 같다. 가을만 들어서면 세월이 엄청 빨리 흘러간다. 하루하루는 고단하고 그래서 아쉬울 것 ..

길위의단상 2008.11.17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 안도현

어릴 때, 두 손으로 받들고 싶도록 반가운 말은 저녁 무렵 아버지가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정육점에서 돈 주고 사온 것이지마는 칼을 잡고 손수 베어온 것도 아니고 잘라온 것도 아닌데 신문지에 둘둘 말린 그것을 어머니 앞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한 마디, 고기 좀 끊어왔다는 말 가장으로서의 자랑도 아니고 허세도 아니고 애정이나 연민 따위 더더구나 아니고 다만 반갑고 고독하고 왠지 시원시원한 어떤 결단 같아서 좋았던, 그 말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이웃에 고기 볶는 냄새 퍼져나가 좋을 거 없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지 그래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방문을 꼭꼭 닫고 볶은 돼지고기를 씹으며 입 안에 기름 한입 고이던 밤 -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 안도현 이번에 안도현..

시읽는기쁨 2008.02.13

나만의 비밀 / 안도현

개울에서 놀다가 그만 급해서 물속에 앉아 쉬를 하고 말았습니다 행여 누가 볼까 두리번두리번 나 혼자 몸을 한 번 떨었습니다 개울물이 팬티 속에 손을 넣어 고추를 살살 씻어 주었습니다 - 나만의 비밀 / 안도현 이런 동시를 읽으면자꾸 눈물이 난다. 저런 동심이 나에게도 있었었나 싶은, 이젠 흔적조차 희미해져 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과 서글픔 때문일지 모른다. 개울에서 쉬한 것이 부끄러웠던 시절에서 이젠 목욕탕에서도 눈 딱 감고 시치미 뗄 수 있는 나이로 되었다. 무례하고 뻔뻔해도 당당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그런 것이리라. 이 동시의 백미는 끝 구절이 아닐까? '개울물이 팬티 속에 손을 넣어 고추를 살살 씻어 주었습니다'- 자연과 동심의 아름다운 어울림에 절로 미소가 일면서 잠시 눈..

시읽는기쁨 2007.08.14

명자꽃

10년 전에 살던 곳 화단에 명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명자나무는 유난히도 붉은 꽃송이를 탐스럽게 피웠다. 따스한 봄햇살 아래 온통 붉게 뒤덮인 나무는 마치 훨훨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가까이 접근하기에 두려울 정도로 눈부시게 빛났다. 활짝 핀 명자꽃은 화려하게 성장을 한 여인네를 연상시킨다. 그것은 꽃 이름이 사람 이름을 닮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명자야'라고 가만히 불러오면 왠지 정겨운 어릴 적 동무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색깔이 너무 짙고 화려해서쉬이 다가가기 어렵기도 하다. 명자나무는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서로 겹칠 정도로 많은 꽃을 매달고 있다. 어떤 때는 처연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명자꽃은 깊은 슬픔과 애조를띄고 있다. 명자꽃 옆에 있으면 괜스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꽃들의향기 2007.04.10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쳐다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

시읽는기쁨 2006.08.29

집에 대하여 / 안도현

손에 흙 하나 묻히지 않고 집을 갖는다는 것은 저 제비들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볏짚 한 오라기 엮어 얹지 않고 진흙 한 톨 물어다 바르지 않고 너나 없이 창문 큰 집을 원하는 것은 세상에 그만큼 훔치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인가 허구한 날 공중에 떠서 살아가다 보면 내 손으로 땅 위에 집을 한 채 초가삼간이라도 지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혹시 바람에 찢기도 무너진다 해도 훗날 내 자식새끼들이 자라면 꽁지깃을 펴고 실패하지 않는 집을 다시 지을 테니까 - 집에 대하여 / 안도현 남은 내 꿈의 중의 하나는 내손으로직접 내 집을 지어 보는 것이다. 언젠가 넥타이를 벗어 던지게 되는 날이 오면 그 꿈은 현실로 다가올 것으로 믿고 있다. 흙을 올리고, 나무를 세우며, 1년이 걸리든, 3년이 걸리든, 작은 집 한..

시읽는기쁨 2005.06.10

연탄 한 장 /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어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연탄 한 장 /안도현 날이 다시 추워졌다. 서울 기온이 영하 9도까지 떨어..

시읽는기쁨 2005.02.20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 안도현

저 도시를 활보하는 인간들을 뽑아내고 거기에다 자작나무를 걸어가게 한다면 자작나무의 눈을 닮고 자작나무의 귀를 닮은 아이를 낳으리 봄이 오면 이마 위로 새 순 새록새록 돋고 가을이면 겨드랑이 아래로 가랑잎 우수수 지리 그런데 만약에 저 숲을 이룬 자작나무를 베어내고 거기에다 인간을 한 그루씩 옮겨 심는다면 지구가, 푸른 지구가 온통 공동묘지 되고 말겠지 -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 안도현 저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 중에서 자작나무를 닮은 사람이 많아진다면 도시는 푸른 숲의 향기로 가득할 거야. 칙칙한 매연 대신에 신선한 산소가 거리를 감싸고 사람들은 이제 심호흡을 크게 할 거야. 잿빛 도시에 꽃이 피어나고, 예쁜 새들이 찾아와 노래할 거야. 사람들의 마음도 꽃처럼 환하게 피어나고,새들 따라서 ..

시읽는기쁨 2004.09.06

애기똥풀

어느 해 봄 나들이를 나갔을 때였다. 길 옆에 핀 이 꽃을 보고 아내가 무척 반가와했다. "와, 애기똥풀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식욕이 없을 때면 어머니가 이 풀을 삶아주었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 운동장 둘레에많이 피어있던 이 풀을 꺾어서 집으로 가져가곤 했다며 옛날 이야기를 했다. 나도 그 때 이 풀 이름을 처음 알았다. 잎이나 꽃은아름답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요사이 유행하는 얼짱이나 몸짱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별 주목을 받지도 못한다. 그러나 바라보면 볼수록 정겹기만 하다. 줄기를 자르면 나오는 액의 색깔이 마치 애기똥색과 비슷하다고 해서 애기똥풀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 꽃만 보면 안도현님의 다음 시가 떠오른다.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

꽃들의향기 2004.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