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12

가만히 다정하게

장마철과 연관이 있을까. 짜증 나고 화가 솟는 일이 잦다. 이럴 때는 한 호흡 쉬어가야 한다. 그리고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봐야 한다. 다정하게. 짜증 나는 원인이 밖에 있지 않다고 누군가가 속삭여준다. 화를 내는 것은 내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대상은 어쩌다 거기에 있었을 뿐이다. 단지 핑곗거리였을 뿐. 누구나 위로 받고 사랑 받길 원한다. 고개를 돌려 둘러보라. 누가 나를 위로하고 사랑해 줄 것인가. 이 시들어가는 세상에서 변함없이.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음을 안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자. 작고 연악한 어린아이가 오들오들 떨고 있을지 모른다. 다정한 미소로 다가가서 껴안아주자. 쓰담쓰담 토닥토닥. 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를 알면 타인 역시 연민의 념으로 바라보게..

참살이의꿈 2023.07.25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

누가 쓴 글인지 모르겠지만 오래 전에 본 짧은 문장 하나가 기억에 남아 있다.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 가끔 독백하듯 되뇌면 왠지 위로가 되는 말이다.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글쓴이의 의도는 잊어버렸지만 지금은 내 식대로 해석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서 '그냥'의 뜻을 나는 '생각 없이' '편하게' '고통 없이' 등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누구나 자기 나름의 삶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개똥철학일 망정 자신을 지탱해 주는 삶의 지표가 있다. 그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분별하며 살아간다. 그런 과정에서 가치관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냥 거저먹기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겉으로 볼 때는 세상 부러울 것 같이 사는 사람도 내면을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다. 다 자기 몫의 고뇌와 고통..

참살이의꿈 2019.12.04

포장마차 국수집 주인의 셈법 / 배한봉

바람 몹시 찬 밤에 포장마차 국수집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예닐곱쯤 되는 딸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늙수그레한 주인이 한 그릇 국수를 내왔는데 넘칠 듯 수북하다 아이가 배불리 먹고 젓가락을 놓자 남자는 허겁지겁 남은 면발과 주인이 덤으로 얹어준 국수까지 국물도 남김없이 시원하게 먹는다 기왕 선심 쓸 일이면 두 그릇을 내놓지 왜 한 그릇이냐 묻자 주인은,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 사람이 한 그릇 값 내고 한 그릇은 얻어먹는 것이 되니 그럴 수야 없지 않느냐 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 포장마차 주인의 셈법이 좋아 나는 한참이나 푸른 달을 보며 웃는다 바람은 몹시 차지만 하나도 춥지 않다 - 포장마차 국수집 주인의 셈법 / 배한봉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 누군가를 도울 때에도 세심한 배려가 필요..

시읽는기쁨 2014.01.10

이른 아침에 / 서정홍

감자밭 일구느라 괭이질을 하는데 땅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 툭 튀어나왔습니다. 날카로운 괭이 날에 한쪽 다리가 끊어진 채 나를 쳐다봅니다. 하던 일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루 내내 밥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물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 이른 아침에 / 서정홍 공감이나 동정을 뜻하는 'empathy'와 연민을 뜻하는 'sympathy'는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걸 들었다. 타인의 아픔을 머리로 이해하는 게 '엠퍼시'라면, 가슴으로 느끼는 게 '심퍼시'라는 것이다.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사고나 불행한 소식들에 반응하는 감정은 대부분 엠퍼시에 해당한다고 봐야겠다. 이런 엠퍼시의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인간이 사이코패스인지 모른다.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의 마음이야말로 심퍼시라고 부..

시읽는기쁨 2012.09.22

이모에게 가는 길 / 양애경

미금 농협 앞에서 버스를 내려 작은 육교를 건너면 직업병으로 시달리다가 공원도 공장주도 던져 버린 흉물 공장 창마다 검게 구멍이 뚫린 원진 레이온 건물이 나올 것이다 그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젊은 버스 기사와 야한 차림의 10대 아가씨의 푹 익은 대화를 들으며 종점까지 시골길 골목을 가야 한다 거기서 내려 세 집을 건너가면 옛날엔 대갓집이었다는 낡은 한옥이 나오고 문간에서 팔순이 된 이모가 반겨줄 것이다 전에는 청량리역까지 마중을 나왔고 몇 달 전에는 종점까지 마중을 나왔지만 이제 이모는 다리가 아파 문간까지밖에 못 나오실 것이다 아이고 내 새끼 라고 이모는 말하고 싶겠지만 이제 푹 삭은 나이가 된 조카가 싫어할까봐 아이고 교수님 바쁜데 왠일일까 라고 하실 것이다 사실 언제나 바쁠 것 하나 없는데다가 ..

시읽는기쁨 2012.05.28

아름다운 위반 / 이대흠

기사양반! 저짝으로 쪼깐 돌아서 갑시다 어칳게 그란다요. 뻐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재 쓰잘데기 읎는 소리하지 마시요 저번착에 기사는 돌아 가듬마는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착에도 내가 모셔다 드렸는디 - 아름다운 위반 / 이대흠 가슴이 따스해지는 시다. 또 귀에 착착 엥기는 전라도 사투리가 시의 맛을 더해준다.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재'라는 노인네는 고향에 계신 우리들의 어머님, 아버님이시다. 운전기사는 겉으로는 면박을 주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눈이 어두워가는 노인을 보며 마음 아파한다. 이런 시를 읽으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걸 '연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파하는 사람이나 ..

시읽는기쁨 2009.09.24

이것이 날개다 / 문인수

뇌성마비 중증지체, 언어장애인 마흔두 살 라정식씨가 죽었다. 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 이들의 평균 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점심식사중이다. 떠먹여 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 (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 주실 거죠?)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뜨렸다.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시읽는기쁨 2008.10.06

가재미 /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 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시읽는기쁨 2008.10.01

이불 한 채 / 유강희

내가 사는 작은 동리 어느 집 대문 앞에 오래된 이불 한 채 나와 있다 이불은 제 몸을 둘둘 말아 모지락스런 세월도 층층으로 골고루 펴 떠받들고 앉아 있었는데 안으로 접힌 주름이 켜켜이 그늘을 만들어 무슨 꽃 자글자글 피우고 있는 게 적이나 내겐 마음 깨끼는 일이었다 그래, 무슨 말을 할라치면 어디서 붉은 접시꽃이 걸어와 입을 가로막고 지금 내 앞의 한 채 이불이란 고스란히 저 옛집의 대소사를 올올이 새기고 있을 거였다 첫날밤 족두리 푼 신부의 두근거리는 호롱불 그림자가 다녀갔으리라 그리하여 밤이면 젊은 내외가 서로 살을 섞어 청대 같은 자식도 연년으로 놓았을 거였다 아니면 평생 골골 앓는 사내의 피고름 다 받아낸 한숨 덕지덕지 괸 누더기 꽃자리였거나 혹은, 시어머니 구박에 못 견딘 며느리 속울음까장 자..

시읽는기쁨 2008.08.27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난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

시읽는기쁨 2005.10.28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세상도 아프고 나도 아프다. 나도 불쌍하고 세상도 불쌍하다. 병든 세상을 아파하는 깊은 슬픔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다. 측은지심은 동정심이 아니라 인간의 따스하고 순수한 의식이다.사물의 깊은 면을 바라볼 때 사람이 불쌍하게 느껴지고 세상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그래서 다른 존재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며 행복해지기를 염원하는 마음이다. 맹자(孟..

시읽는기쁨 2005.03.12

사람들은 모두 불쌍해

한미르 커뮤니티에 김정란 님의 '현대시 읽기'라는 칼럼이 있다. 몇 번 게재되다가 지금은 글이 올라오지 않아 아쉬운데, 옛 글 중에서 공감이 가는 내용이 있어 옮겨 본다. 김정란 님은 언젠가 TV 프로에서 본 적이 있는데, 시인이 정치 토론 프로에 나온게 특이해서 유심히 지켜 보았다. 보수쪽 공격에 대해 차분하게 대응하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현실에 비판적이면서도 인간과 세상에 대한 따스한 연민의 눈이 느껴졌는데 이 글에서도 비슷한 것을 읽을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불쌍해! 나도 불쌍하고, 너도 불쌍하고, 우리 부모님도 불쌍하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불쌍하다.' 나에게도 그런 느낌이 가끔식 찾아와 가슴이 아려지는 요즈음이다. 누구든 자기 한 몸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지요. 조금씩 그 고통을 가볍게 만들기..

길위의단상 2004.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