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5

눈감지 마라

이기호 작가가 7년 전에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소설을 책으로 묶어냈다. 신문 연재의 특성상 짧은 내용으로 된 연작인데, 각 부분이 독립된 에피소드로 되어 있으면서 일관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지방에서 작은 대학을 졸업한 정용과 진만은 원룸을 얻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간다. 번듯한 일자리나 기본 자본이 없는 상태에서 내동댕이쳐지다시피 생존경쟁의 정글에 뛰어든 셈이다. 도리어 학자금 융자에 따른 1천만 원 정도의 빚을 안고 사회생활에 나선 것이다. 둘은 편의점, 택배 상하차, 출장 뷔페, 고속도로 휴게소 아르바이트 등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조금씩 빚을 갚으면서 힘겹게 살아간다. 겨울에는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팬티스타킹을 사 입고, 아파도 마음대로 병원에도 가지 못한다. 그러니 문화생활은 ..

읽고본느낌 2024.03.06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포함해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나온 지 14년이 되어선지 최근에 나온 작품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냉소적이면서도 싱싱한 야성의 냄새가 난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특이하다.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 교양 없이 막돼먹은 사람들이 주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세태를 고발하고 잘난 척하는 사람들의 위선을 까발린다. 더러운 욕망의 카니발에 그들은 민낯을 드러내지만 우리는 가면을 쓰고 점잖은 척 할 뿐이다. 책 제목으로 삼은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성경의 장과 절을 흉내 낸 형식이 재미있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의인 최순덕에게 내린 성령의 감화 감동 이야기라 이곳에 하나의 보탬과 빠짐없이 기록하나니'가 1장 1절이다. 최순덕은 열심 신자인 부모 밑에서 오..

읽고본느낌 2018.09.09

김 박사는 누구인가?

여름에는 소설 읽기가 제일이다. 요즘처럼 찜통더위가 계속될 때는 집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소설을 벗하는 게 최고의 피서다. 전기료가 걱정된다지만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싸게 먹힌다. 재미있는 소설을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여름을 보낼 수 있다. 는 이기호 작가의 단편소설집이다.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최근에 이기호 작가의 작품을 자주 읽는데 이야기가 경쾌하면서 생생하게 살아 있어 좋다. 그러면서 단단한 뼈대를 숨기고 있다. 쉽게 읽히지만 한참을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는 '탄원의 문장'이 제일 인상 깊었다. 대학교에서 일어난 과실치사 사고와 관련된 이야기다. 후배들 기강을 잡는다고 선배들이 강압적으로 술을 마시게 하고 훈계를 했다. 그중 한 여학생이 집으로 돌아간 뒤..

읽고본느낌 2018.08.16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기호 작가의 '가족 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그러나 소설이라기보다는 작가 가족의 실제 삶을 정감있게 보여주는 글 모음이다. 2011년부터 월간지에 연재된 내용을 책으로 묶었다. 슬며시 미소를 띄게 되다가도 찡해지는 순간이 많다.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삶의 애환이 맛깔스런 문장에 잘 표현되어 있다. 서로를 아끼고 보듬어주며 살아가는 마음씨가 곱다. 글 한 편 한 편이 예쁜 삽화 같다. 책의 처음에 적힌 한 문장이 오래 눈길이 간다. "누운 자리는 좁았고,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이 있었다." 글 하나를 옮긴다. 이 책 제목으로 인용된 내용이 들어 있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때까지도 책 제목을 착각했다. '여든'이 아니고 '여름'이라니, 나도 여덟 살 꼬맹이에 다름 아니다. 여름이 되면 올해 여..

읽고본느낌 2018.04.30

차남들의 세계사

"작가는 고통받는 사람들에 관해 쓸 의무가 있다." 이기호 작가가 한 말로 기억한다. 작가의 글에는 세상의 고통과 인간에 대한 연민, 그리고 세상살이의 애틋함이 녹아 있다. 이 소설 도 그런 범주에 들어간다. 는 대머리 독재자가 등장한 1980년대가 배경이다. 1982년에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일으킨 문부식과 김은숙은 지학순 주교가 있던 원주로 피신한 뒤 자수했지만, 수사 당국은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선다. 이때 택시 운전사였던 나복만은 아무 관련도 없으면서 이 사건에 엮이게 된다. 교통사고로 경찰서를 찾게 되었는데, 실수로 그의 이름이 사건 관련자 명단에 포함된 것이다. 그리고 몇 가지 우연이 겹치면서 독재 시대 때 흔했던 용공 조작의 희생자가 되고 만다. 소설은 미친 시대에 한 인..

읽고본느낌 2018.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