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9

바람의 집 / 이종형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이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 바람의 집 / 이종형 어제가 제주 4.3 사건 76주년이었다. TV로 추념식을 보며 이념 갈등으로 벌어진 우리 현대사의 ..

시읽는기쁨 2024.04.04

어머, 몰랐어 / 박봉준

동네 미장원에서 할머니들이 수군거리는데 선거에 나온 아무개가 빨갱이라여 빨갱이를 뽑으면 큰일 나지 암, 나라가 망하지 머리를 말다 듣기 민망스러운 미장원 원장이 아니라고 설명을 해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얘기는 윤사월 해처럼 길어지고 그래서 그런지 그 빨갱이가 보기 좋게 떨어졌는데 나중에 미장원 원장이 친구 사이인 그 빨갱이 부인을 만나 할머니들 얘기를 했더니 어머, 내 남편이 빨갱이가 된 걸 우리는 여태 몰랐어 선거 후에도 기력이 남았는지 한바탕 휘도록 웃었다는 빨갱이 부인 - 어머, 몰랐어 / 박봉준 미국에 살고 있는 대학 동기가 한국에 다니러 왔다가 어제 양재동 모임에 나왔다. 이젠 고국에 돌아와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말했다.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면 사회주의 국가가 될 텐데 겁이 나..

시읽는기쁨 2023.07.07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일장을 치르면서 조문객들을 통해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아버지를 새롭게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아버지에 얽힌 사연이 가벼우면서 유머러스하게 그려져 있어 묵직한 주제인 이데올로기 문제가 깔려 있지만 부담 없이 읽힌다. 신안 여행을 할 때 책을 가져가서 이틀 저녁 동안에 다 읽었다. 정지아 작가의 전작인 이 부모의 구술을 받아 실제 일어난 사건을 정리한 것이라면, 이번 는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이 결연한 비장미를 풍긴다면, 이 책은 경쾌한 댄스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미소와 함께 가슴 뭉클한 장면도 많다. 자신의 신조였던 사회주의와 평등사상을 삶으로 실천하신 아버지의 모습은 존경심이 든다. 이념은..

읽고본느낌 2023.05.20

위기의 민주주의

2019년에 제작된 브라질 정치 상황을 다룬 다큐멘터리로 넷플릭스에 올려져 있다. 2002년에 룰라가 군사 독재를 물아내고 브라질의 대통령이 된 때로부터, 룰라의 후계자였던 지우미가 탄핵되고 부패 스캔들로 룰라가 구속된 2018년의 상황까지를 다룬다.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과 겹쳐보이면서 먼 남의 나라 일 같지 않았다. 브라질은 극심한 이념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작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룰라가 세 번째로 당선되었지만 극우인 보우소나루와는 1.8% 차이였다. 보우소나루의 극력 지지층에서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최근에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식이면 룰라가 국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우파 기득권층이 다시 어떤 음모를 벌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브라질 정치 구조상 안정을 찾기는 쉽지..

읽고본느낌 2023.03.23

빨치산의 딸

정지아 작가가 25세 때인 1990년에 쓴 두 권으로 된 실록 장편소설이다. 빨치산 출신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소설 형식으로 쓴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책으로 나오자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출판사 사장은 구속되기까지 했다. 작년에 작가가 쓴 가 인기를 끌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출판된 지 30년이 지나서야 읽어보게 되었다. 은 프롤로그, 1부, 2로 구성되어 있는데 프롤로그는 빨치산의 딸로 자라난 작가의 성장기다. 빨갱이의 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느낀 좌절과 분노, 부모와 사회에 대한 반항심 등이 아프게 다가온다. 1부는 아버지, 2부는 어머니의 빨치산 활동이 독립적으로 그려져 있다. 해방이 되고 육이오 전쟁을 거친 1945년에서 1955년까지의 10년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격동..

읽고본느낌 2023.02.07

친일과 대한민국

친구가 카톡으로 긴 글을 보내 주었다. 글쓴이는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인 최진석 선생이다. 전에 EBS를 통해 선생의 노자 강의를 감명 깊게 들었던 적이 있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이념 갈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해방 직후의 좌우 대립 상황을 보는 것 같다. 성숙한 대한민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차피 한 번은 견뎌내야 할 통과의례인지 모른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언젠가는 발목을 잡는다. 친일과 반일에 관련된 논란도 그중 하나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독단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많지만 선생의 견해 역시 경청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가을호에 실린 따끈따끈한 글이다. 친일과 대한민국 / 최진석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꿈꾸는 나는 작년 7월에 발표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

길위의단상 2020.09.01

국정

'국정(國定)'이란 말 그대로 나라에서 정한다는 뜻이다. 일단, 나라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유신 때도 교과서를 국정화하면서 독재를 미화하고 한국적 민주주의로 포장해서 가르쳤다. 이름만 국가를 내걸었을 뿐 실은 권력자의 입맛에 불과하였다. 역사상 수많은 민중의 희생이 국가 폭력 아래 자행되었다. 국가를 우상화하던 시대는 지났다. 국가는 역사 가치관의 기준을 정할 자격이 없다. 상식적 수준에서 생각하면 된다. 역사 교과서가 잘못되어 있다고 본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현재의 검정제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 검정 기준을 강화한다든지 새로운 교과서를 만들어 시장에 내놓으면 된다. 일본이 하는 방법이다. 일본은 비난하면서 더 나쁜 짓을 지금 정부는 하고 있다. 마음에 안 든다고 국정 체제로 가는 건 선친..

길위의단상 2015.11.07

우리를 지배하는 이즘

한 사람이 가지는 가치관은 시대와 환경의 산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단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그런 점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적 특성과 가치규범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나를 아는 것과 직결되는 문제다. 즉,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고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체화되어 저절로 표현되는 모든 삶의 양식을 어떤 분은 '문화적 문법'이라고 불렀다. 대화할 때 국어문법을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듯, 우리는 문화적 문법에 자연스레 젖어서 그 틀로 생각하고 결정하게 된다. 이 분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을 크게는 두 카테고리로, 작게는 12가지로 분류했다.이런 분류가 현상을 단순화시키는 위험이 있지만 그래도 우리를 전체적..

길위의단상 2007.11.11

디어 평양

명동 CQN에서 ‘디어 평양’을 보았다.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재일동포 양영희 감독은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15살에 제주도를 떠나 일본에 정착, 해방을 맞은 후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한 열렬한 조총련 간부였다. 결혼 후 부부는 함께 열정적인 정치 활동을 편다. 자식은 넷을 두었는데 10대의 오빠 셋은 아버지의 신념에 따라 북한으로 보내지고, 남은 딸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는 딸에게 서운해 하며 부녀간의 소원함으로 이어진다. 그때는 아버지와의 대화는 고사하고 밥상에 마주앉는 것도 싫었다고 한다. 후에 딸은 북한을 오가며 오빠들과 그 가족들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는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도 화해하고 아버지의 신념과 결단을 이해하게 된다. ‘디어 평양’은 사적인 한 가족의 이야기지만 ..

읽고본느낌 2006.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