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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88

고뿔이 찾아온 지 일주일 째다. 1년에 한두 번씩 겪어야 하는 연례행사가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찬 기운을 좀 쑀다고 금방 탈이 난 것이다. 그렇다고 온실 속 화초처럼 바깥출입을 안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 이상 더 어떻게 하라는 건지, 거울 속 비실이를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쉰다. 머리가 띵 하고 얕은 기침, 콧물이 흐르는 감기 몸살이다. 심하면 병원이라도 가겠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하니 버텨본다. 내일이면 덜해지겠지,하는 기대를 품게 하니 얄밉다. 요만한 병에도 내 일상은 깨어졌다. 독서와 블로그 글쓰기가 전혀 안 된다. 아예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이럴 때는 드라마에 빠지는 게 제일 낫다. 이번에 고른 드라마는 '응답하라 1988'이었다.  2015년에 방영된 '응답하라 1988'은 1980년대와 ..

읽고본느낌 2024.12.30

나의 아저씨

2018년에 tvN에서 방영된 16부작 드라마다. 추천하는 사람이 많아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정주행했다. 다 보는 데 일주일 정도 걸렸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물을 찍어내는 장면이 많은 휴먼 드라마였다. 주인공인 이선균과 아이유의 연기가 빛났다. 이선균은 작년에 세상을 떠나 보는 내내 안타까웠고, 가수 아이유는 이렇게 재주가 많은 줄 처음 알았다. 그녀의 냉소적이며 시크한 표정이 압권이었다. 두 연기자에게 홀딱 반했다. 겉으로 보면 남 부러울 것 없는 대기업 부장인 박동훈(이선균 분)과 밑바닥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는 이지안(아이유 분)이 서로를 보듬고 힘이 되어 주면서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이야기다. 드라마에서는 인간사의 온갖 사연이 잘 어우러지며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고되고 힘들지 않..

읽고본느낌 2024.11.30

삼천포 / 백석

졸레졸레 도야지 새끼들이 간다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복 따사로운 거리다 잿더미에 까치 오르고 아이 오르고 아지랑이 오르고 해바라기하기 좋을 볏곡간 마당에볏짚 같이 누우란 사람들이 둘러서서어느 눈 오신 날 눈을 츠고 생긴 듯한 말다툼 소리도 누우라니 소는 기르매 지고 조은다 아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 삼천포-남행시초4 / 백석  백석은 20대 때 남해안을 여행했다. 통영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 쓴 시가 '남행시초(南行詩抄)'로 여러 편이 전한다. 이 시 '삼천포'도 당시의 따사로운 정경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구절인 '아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에 유난히 마음이 가 닿는다. 요사이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정주행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는 '따스한 가난'에 가슴이 뭉클..

시읽는기쁨 2024.11.26

내 어머니 이야기

김은성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의 일생을 그린 4권으로 된 만화책이다. 전부터 이 책의 유명세를 알고 있었으나 만화라는 이유로 차일피일 읽기를 미루었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이면 가벼운 만화가 어떨까 싶어 도서관 서가에서 꺼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마치 판화와 같은 흑백의 그림이 주는 효과가 더해져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작가의 어머니는 함경도 북평에서 나고 자라 결혼하며 살다가 6.25 때 남한으로 내려왔다. 북과 남에서 일제 강점시대와 전쟁, 분단과 근대화 과정을 전부 체험한 것이다. 한 개인의 일생에 우리나라의 역사가 투영되어 있다. 험난한 세월을 견뎌낸 한 여인의 사연이 안쓰러우면서 따뜻하다. 특히 함경도에서 보낸 어머니의 소녀 시절 이야기는 옛 농촌 공동체의 따스한 모습을 보여준다. 내 고향 마을..

읽고본느낌 2024.08.20

불편한 편의점

도서관에 갈 때마다 이 책이 있는지 확인해 보지만 항상 대출 중이었다. 심지어는 예약까지 여러 명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다. 김호연 작가가 쓴 은 올해의 가장 핫한 소설이다. 인기에 힘입어 얼마 전에 2권까지 나오고,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는 보도도 보았다. 마침 지인이 책을 빌려줘서 읽어보게 되었다. 소설은 사람이 살아가는 온기로 가슴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울컥해지는 장면이 곳곳에 대기하고 있다. 삭막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따스한 위안을 주면서 현실에서는 체험하기 힘든 경험을 소설에서 하게 된다. 이 소설이 왜 인기가 있는지 알겠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소설적으로는 구성이나 내용에서 뛰어나 보이지는 않는다. '올웨이즈'라는 편의점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

읽고본느낌 2022.12.17

다정소감

책 제목인 '다정소감'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다정소감(多情小感)이라고 짐작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책 내용도 내 짐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휩쓸리지 않는 마음을 이런 단어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책 말미에서 작가는 자신의 글이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다정에 대한 감상이자, 다정들에서 얻은 작고 소중한 감정의 총합'이라고 말한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다정소감(多情所感)이다. 내 엉뚱한 추측에 실소를 했다. 은 김혼비 작가의 산문집이다. 글에서는 글을 쓴 사람이 보인다. 지은이는 어떤 사람일까, 상상도 해 본다. 김혼비 작가는 따스한 마음을 가졌으면서 다이내믹한 분 같다. 정과 동을 겸비한, 그래서 만나면 무척 재미있을 분으로 느껴졌다. 풋풋한 햇사과를 먹는 것..

읽고본느낌 2022.09.30

온돌방 / 조향미

할머니는 겨울이면 무를 썰어 말리셨다 해 좋을 땐 마당에 마루에 소쿠리 가득 궂은 날엔 방 안 가득 무 향내가 났다 우리도 따순 데를 골라 호박씨를 늘어놓았다 실겅엔 주렁주렁 메주 뜨는 냄새 쿰쿰하고 윗목에선 콩나물이 쑥쑥 자라고 아랫목 술독엔 향기로운 술이 익어가고 있었다 설을 앞두고 어머니는 조청에 버무린 쌀 콩 깨 강정을 한 방 가득 펼쳤다 문풍지엔 바람 쌩쌩 불고 문고리는 쩍쩍 얼고 아궁이엔 지긋한 장작불 등이 뜨거워 자반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집으며 우리는 노릇노릇 토실토실 익어갔다 그런 온돌방에서 여물게 자란 아이들은 어느 먼 날 장마처럼 젖은 생을 만나도 아침 나팔꽃처럼 금세 활짝 피어나곤 한다 아, 그 온돌방에서 세월을 잊고 익어가던 메주가 되었으면 한세상 취케 만들 독한 밀주가 되었으면 아..

시읽는기쁨 2020.01.04

고만례 할머니와 놋양푼 아줌마 / 이창숙

깊은 산속에 혼자 사는 고만례 할머니는 어느 여름 저녁 모깃불 피운 멍석에 앉아 밤하늘에 솜솜 박힌 별을 세며 옥수수를 먹고 있었대 그때, 머리에 커다란 짐을 인 아줌마가 사립문을 빼꼼 열고 들어오더래 저녁도 못 먹었다는 아줌마에게 있는 반찬에 남은 밥을 차려준 뒤 짐을 풀어 하나하나 살펴보던 할머니는 반짝반짝 빛나는 놋양푼이 그렇게나 좋아 보였다지 뭐야 며칠 뒤 있을 할아버지 제사 때 떡과 나물과 전을 담으면 좋을 것 같았지 한 개에 삼백 원이라는 놋양푼을 두드려 보고 만져 보고 문질러 보다 할머니는 은근하게 흥정을 했대 "세 개 살 테니 천 원에 주슈." 열무 비빔밥을 한입 가득 떠 넣던 놋양푼 아줌마는 눈을 깜빡이며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그렇게는 안 된다고 거절했대 하지만 할머니는 조르고 또 졸..

시읽는기쁨 2015.12.29

한 수 위 / 복효근

어이, 할매 살라먼 사고 안 살라먼 자꼬 만지지 마씨요 - 때깔은 존디 기지가 영 허술해 보잉만 먼 소리다요 요 웃도리가 작년에 유행하던 기진디 우리 여편네도 요거 입고 서울 딸네도 가고 마을 회관에도 가고 벵원에도 가고 올여름 한려수도 관광도 댕겨왔소 물도 안 빠지고 늘어나도 않고 요거 보씨요 백화점에 납품하던 상푠디 요즘 겡기가 안 좋아 이월상품이라고 여그 나왔다요 헹편이 안 되먼 깎아달란 말이나 허제 안즉 해장 마수걸이도 못했는디 넘 장사판에 기지가 좋네 안 좋네 어쩌네 구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허들 말고 어서 가씨요 - 뭐 내가 돈이 없어 그러간디 나도 돈 있어라 요까이껏이 허면 얼마나 헌다고 괄시는 괄시요 팔처넌인디 산다먼 내 육처넌에 주지라 할매 차비는 빼드리께 뿌시럭거리며 괴춤에서 돈을 꺼내 ..

시읽는기쁨 2013.01.24

기찬 딸 / 김진완

다혜자는 엄마 이름. 귀가 얼어 톡 건들면 쨍그랑 깨져버릴 듯 그 추운 겨울 어데로 왜 갔던고는 담 기회에 하고, 엄마를 가져 싸아한 진통이 시작된 엄마의 엄마가 꼬옥 배를 감싸쥔 곳은 기차 안. 놀란 외할아버지 뚤레뚤레 돌아보니 졸음 겨운 눈, 붉은 코, 갈라터진 입술들뿐이었는데 글쎄 그게, 엄마 뱃속에서 물구나무를 한번 서자, 으왁! 눈 휘둥그런 아낙들이 서둘러 겉치마를 벗어 막을 치자 남정네들 기차 배창시 안에서 기차보다도 빨리 '뜨신 물 뜨신 물' 달리기 시작하고 기적소린지 엄마의 엄마 힘쓰는 소린지 딱 기가 막힌 외할아버지 다리는 후들거리기 시작인데요, 아낙들 생침을 연신 바르는 입술로 '조금만, 조금만 더어' 애가 말라 쥐어트는 목소리의 막간으로 남정네들도 끙차, 생똥을 싸는데 남사시럽고 아프..

시읽는기쁨 2010.08.30

아이고 문디야 / 권기호

태백산 돌기로 내려온 지판은 오래전 문경암층 방향 틀어 바람소리 물소리 이곳 음질 되어 영일만 자락까지 퍼져있었다 어메요 주께지 마소 나는 가니더 미친년 주것다 카고 이자뿌소 부푼 배를 안고 부풀게 한 사내 따라 철없는 딸은 손사래치며 떠나는데 아이고 저 문디 우째 살라 카노 아이고 저 문디 우째 살키고 인연의 삼배끈 황토길 놓으며 어메는 목젖 세하게 타고 있었다 호박꽃 벌들 유난스런 유월 느닷없이 남의 살 제 몸에 들어와 노을빛 먹구름 아득히 헤맨 딸에게 어메는 연신 눈물 훔치며 맨살 드러낸 산허리 흙더미 내리듯이 마른 갈대소리 갈대가 받듯이 토담에 바랜 정 골짜기에 쌓을 수밖에 없는데 세월 흘러도 신생대 암층 고생대 지층이 받쳐왔듯이 풍화된 마음 먼 훗날 만나게 되면 아이고 이 문디 우째 안죽고 살았..

시읽는기쁨 2009.09.28

아름다운 위반 / 이대흠

기사양반! 저짝으로 쪼깐 돌아서 갑시다 어칳게 그란다요. 뻐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재 쓰잘데기 읎는 소리하지 마시요 저번착에 기사는 돌아 가듬마는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착에도 내가 모셔다 드렸는디 - 아름다운 위반 / 이대흠 가슴이 따스해지는 시다. 또 귀에 착착 엥기는 전라도 사투리가 시의 맛을 더해준다.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재'라는 노인네는 고향에 계신 우리들의 어머님, 아버님이시다. 운전기사는 겉으로는 면박을 주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눈이 어두워가는 노인을 보며 마음 아파한다. 이런 시를 읽으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걸 '연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파하는 사람이나 ..

시읽는기쁨 2009.09.24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 안도현

어릴 때, 두 손으로 받들고 싶도록 반가운 말은 저녁 무렵 아버지가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정육점에서 돈 주고 사온 것이지마는 칼을 잡고 손수 베어온 것도 아니고 잘라온 것도 아닌데 신문지에 둘둘 말린 그것을 어머니 앞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한 마디, 고기 좀 끊어왔다는 말 가장으로서의 자랑도 아니고 허세도 아니고 애정이나 연민 따위 더더구나 아니고 다만 반갑고 고독하고 왠지 시원시원한 어떤 결단 같아서 좋았던, 그 말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이웃에 고기 볶는 냄새 퍼져나가 좋을 거 없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지 그래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방문을 꼭꼭 닫고 볶은 돼지고기를 씹으며 입 안에 기름 한입 고이던 밤 -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 안도현 이번에 안도현..

시읽는기쁨 2008.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