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8

겨울 산 /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 겨울 산 / 황지우 이 세상에 세 들어 사는 우리가 월세로 내야 하는 게 고통이란다. 고통의 해석이 신선하다. 살면서 응당 지불해야 할 대가로 생각한다면 고통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으리라. 더 나아가 성장과 발전의 디딤돌로 삼을 수도 있다. 시인은 겨울 산에 올라서 사람만 아니라 산 역시 견디며 산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만물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어떤 연유로 집에서 나왔든,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라고 마음먹은 걸 보니 삶을 대하는 태도가 너그러워졌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기회주의자'라는 단..

시읽는기쁨 2021.10.04

꽃피는, 삼천리금수강산 / 황지우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미아리 점쟁이집 고갯길에 피었습니다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파주 인천 서부전선 능선마다 피었습니다 백목련꽃이 피었습니다 방배동 부잣집 철책담 위로 피었습니다 철쭉꽃이 피었습니다 지리산 노고단 상상봉 구름 밑에 피었습니다 라일락꽃이 피었습니다 이화여자대학 후문 뒤에 피었습니다. 유채꽃이 피었습니다 서귀포 앞 남마라도 산록에 피었습니다 안개풀꽃이 피었습니다 망월리 무덤 무덤에 피었습니다 망초꽃이 피었습니다 동두천 생연리 봉순이네 집 시궁창에 피었습니다 수국꽃이 피었습니다 순천 송광사 명부전 그늘에 피었습니다 칸나꽃이 피었습니다 수도육군통합병원 화단에 피었습니다 백일홍꽃이 피었습니다 태백산 탄광 간이역 침목가에 피었습니다 해바라기꽃이 피었습니다 봉천동 판자촌 공중변소 문짝 앞에 피었습니다 ..

시읽는기쁨 2018.04.14

무등 / 황지우

山 절망의산, 대가리를밀어버 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산, 사랑의산, 침묵의 산, 함성의산, 증인의산, 죽음의산, 부활의산, 영생하는산, 생의산, 회생의 산, 숨가쁜산, 치밀어오르는산, 갈망하는 산, 꿈꾸는산, 꿈의산, 그러나 현실의산, 피의산, 피투성이산, 종교적인산, 아아너무나너무나 폭발적인 산, 힘든산, 힘센산, 일어나는산, 눈뜬산, 눈뜨는산, 새벽 의산, 희망의산, 모두모두절정을이루는평등의산, 평등한산, 대 지의산, 우리를감싸주는, 격하게, 넉넉하게, 우리를감싸주는어머니 - 무등(無等) / 황지우 무등산에 오르기 위해 내일 남쪽으로 간다. 대선 끝나고 술을 마시다가 문득 무등산이 생각났다. 찾아가고 싶었다. 그 이름만으로 만나고 싶었다. 무등(無等)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꿈이기에 슬픈 이름이..

시읽는기쁨 2013.01.08

두고 온 것들 / 황지우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 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어느날 내가 살었는지 안 살었는지도 모를 삶이여 좀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 ..

시읽는기쁨 2010.12.19

묵념 5분 27초 / 황지우

- 묵념 5분 27초 / 황지우 제목만 있고 내용이 없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많은 얘기를 한다. 침묵이 웅변보다 더 많은 걸 말할 때가 있다. 여기서 '5분 27초'는 광주항쟁에서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유혈 진압된 5월 27일을 의미한다. 우연히도 그날 즈음인 오늘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렸다. 광주의 죽음과 노무현의 죽음에는 공통된 원인자가 있다. 그 거대한 뿌리를 직시하고 분노해야 할 때다. 건망증 환자처럼 시간이 흐른다고 다시 잊어서는 안 된다. 노 대통령은작은 비석 하나를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비석의 비문을 황지우 시인이 쓴다고 한다. 작은 비석에 들어가는 작은 문장이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하다. 이 시처럼 아무 말이 없는 침묵도 한 방법이 아닐까...

시읽는기쁨 2009.05.29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웃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

시읽는기쁨 2009.05.25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타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그리워한다는 것은..

시읽는기쁨 2007.12.18

발작 / 황지우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 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 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 이거 우주 기적 아녀 - 발작 / 황지우 오늘 아침, 초록으로 가득해진 창 밖을 바라보며 옆의 후배가 5월을 '신(神)의 계절'이라고 불렀다. "그래, 맞아! 지금은 축복의 시간, 기적의 시간이야!" 창 밖의 초록빛에 나는 아득해진다. 내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으로 나는 또 아득해진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모든 것을 가진 듯한 이 풍요감!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래도 계속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 그리움은 아무 형체도 ..

시읽는기쁨 2007.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