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나무

한산리 은행나무

샌. 2009. 3. 24. 09:15



겨울에 사람은 옷을 더 껴입지만 나무는 잎을 떨구고 맨 몸으로 추운 계절을 견딘다. 그래서 오래된 겨울나무의 실루엣에서는 홀로 참선하는 늙은 수도자의 모습이 연상된다.거기에는 모든 것을 다 버린 소박하면서도 엄격한 아름다움이 있다. 겨울나무의 나신(裸身)은 자연의 변화에 적응하는 생존의 한 방식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겨울나무에서 하늘의 섭리에 순응하는 겸손한 모습을 본다. 때가 되면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함을, 그래야 새로운 계절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음을 나무는 가르쳐 준다.

 

경기도 양주시 남면 한산리에는 두 그루의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사진은 그 중 하나인데 키는 27 m이고 나이는 600 년 정도 되었다. 그러나 보호수를 알리는 안내판은땅에서 뒹굴고, 마을 사람들도 나무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기는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귀하게 느껴지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도 어느 사람에게는 이 나무 밑에서 놀던 기억이라든가 애틋한이별의 추억 쯤 있을것도 같다. 내 어린 시절의 나무는 이미 고향에서 다 사라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노랗게 감꽃이 떨어져 있던 감나무는 베어졌다. 초등학교 운동장의 오래된 느티나무도 운동장을 넓히면서 어느 날엔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마을에 있는 이런 고목을 보면 더 부럽게 느껴진다.

 



나무도 겨울은 춥다. 독야청청 푸른 저 소나무도, 갈빛으로 물들었던 깃털 같은 잎새를 떨어뜨리고 섬세하게 가지를 드러낸 메타세쿼이아도, 나무들의 모진 겨울 준비는 이미 지난 가을, 그 무성한 초록빛을 잃어갈 순간부터 시작됐다. 화려했던 단풍 빛깔은 체념의 장렬한 표현이었는지,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굳센 의지의 다짐이었는지, 그 절명의 순간에도 아름다울 수 있는 나무가 난 장하다.


나무와 깊이 사귈수록 놀라는 것은 겨울에 마저도 나무는 그 아름다움의 깊이를 더해 간다는 사실이다. 그저 앙상하게 드러난 나뭇가지려니 했던 줄기는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보여주는 멋진 세상을 숨기고 있다.


얼룩얼룩 둥근 무늬를 만들며 떨어지는 버즘나무, 옆으로 튼 숨구멍을 가지고 암갈색의 반짝이는 수피(樹皮)를 가진 벚나무, 다이아몬드 무늬를 줄기 가득 만들어내고 있는 은사시나무, 얇게 벗겨지는 순백의 껍질을 싸고 있는 자작나무..., 껍질도 모두 다르고, 제각각 다른 각도와 구도로 발달시킨 가지 배열은 때론 자유롭게 때론 규칙적으로 때론 기하학적인 모습을 나타내며 제각각 완벽하게 발달한다.


겨울 나뭇가지의 백미는 겨울눈(冬芽)에 담겨있다. 겨울눈은 어려운 계절을 견뎌내는 나무의 지혜인 동시에 미래이다. 나무들은 봄이 돌아와 새로 자라날 아주 어리고 여린 미래의 꽃과 잎들을 눈 속에 담고, 우리가 겨울코트를 입듯 껍질을 단단히 만들어 추위와 위험에서 보호한다.


모진 겨울을 잘 견딘다는 것은 당연히 받을 어려움이 오지 말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추위에도 잘 견딜수 있는 튼튼한 자신을 만드는 일이다. 이를 알고 미리 준비하는 것이 나무의 방법이다. 겨울눈을 만드는 일 이외에도 나무들은 추위가 스며들 약한 곳을 차단하고, 얼지 않도록 수분을 차단하여 농도를 낮추고 당분 농도를 높이는 등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늘 푸르기만 한 소나무들도 결코 가만히 서서 겨울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지방 함량을 높여 겨우내 조금씩 소모할 에너지를 저장하고 더불어 외부 추위를 막는다. 찬 기운이 드나드는 조직의 구멍들은 주변에 두꺼운 세포벽과 아주 두꺼운 왁스층을 만들어 효과적인 열과 물 관리가 가능토록 한다. 때론 겨울 추위를 내릴 수 있는 터전을 확대하는데 이용하기도 한다. 바위틈에 실뿌리를 많이 만들어 주변의 습기를 가능한 한 최대로 모아 놓으면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을 때 물이 얼어 부피가 늘면서 바위가 벌어지고, 그 틈새로 뿌리가 깊이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알수록 나무는 더욱 장하다.


매년 겨울이 돌아오듯 삶에도 어려움은 반드시 돌아온다. 나무들은 미리미리 다가올 것을 예측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 겨울을 지내면 나무나 인간이나 더욱 강인해 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무가 추위로 피해를 보는 대부분의 계절은 겨울이 아니라 오히려 이른 봄이다. 봄이 온 줄 알고 방심하여 연한 조직을 내어 놓았다가 동해(凍害)를 입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급해도 신중하지 않고 원칙과 기준을 흔드는 성급함은 피하라고 나무들은 말한다.


개나리나 진달래처럼 가장 먼저 새봄을 맞이하고 싶거든 더 치열하게 어려움을 무릅쓰고 준비하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봄이 오고 나서야 서서히 조직을 분화하는 나무들도 있지만 이들의 잎 혹은 꽃들은 이미 지상에 지천인 초록에 묻혀 버리기 십상이다.


나무들은 겨울 끝에 반드시 희망의 새봄이 오고 있음을 말해준다. 혹시 지금 몹시 힘겹다면 내년에 돋아날 겨울눈 속엔 찬란한 봄의 연둣빛 희망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자.

 

- 겨울, 나무가 장하다 / 이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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