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자로(子路)’편에 이런 대화가 나온다.
子貢問曰
鄕人皆好之何如
子曰 未可也
鄕人皆惡之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없다.”
“그러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그 역시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마을의 선(善)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을의 불선(不善)한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누구에게나 칭찬을 받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라고 공자는 말한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란 착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들은 미워하는 사람이란다. 누구에게나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다. 모두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 받고 싶은 욕구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일부의 비판이나 비난에도 마음을 상한다. 그러나 공자의 이 말을 떠올리면 비난을 받는 것이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나에게 덕담이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받는 비판은 도리어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칭찬이나 비난보다는 누구로부터인가에 더 신경을 써야 할 일이다. 물론 착한 사람과 착하지 않은 사람을 나누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공자가 말한 선인(善人)과 불선인(不善人)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 분류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인배들의 험담쯤은 칭찬의 소리로 알아들으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는 사람이 있다. 보통 무골호인(無骨好人)이라 부르는데 그런 사람은 말 그대로 자신의 주관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의 순진한 낙관주의자라고 할 수도 있다.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서 해야 할 말을 숨기는데, 다른 이에게 나쁜 말을 하지 않으므로 사람들로부터는 호감을 얻는다. 그러나 ‘사람 좋다’라는 의미가 정말 좋은 사람을 뜻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세상의 악에 대해 증오하지 않는다고 그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해 침묵하거나 무관심하다면 단순히 인간관계에서 마찰이 없다고 좋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무골(無骨)보다는 유골(有骨)인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지조(志操)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조란 형이상학적인 지향이 있어야 한다. 세속적 목표를 초지일관 지켜나가더라도 그것을 지조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조는 현실을 넘어서려는 초월적 가치관을 가리킨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허상을 실상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고, 세상의 실상을 미화하거나 은폐해서도 안 된다. 그런 명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그가 서 있는 지점은 분명하고 그의 입장은 명확하다.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고 두렵다.
위의 대화에서 공자가 강조한 것은 세상을 보는 바른 관점, 즉 올바른 가치관의 확립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런 사람에게 공자는 세상의 어떤 평가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라고 한다. 실제로 그런 사람은 세상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로 사랑을 받으려는 허황된 욕구가 없다. 특히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들은 이같은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이번 문근영의 선행에 대한 악풀을 보면서 세상에는 구제하기 힘든 인간도 많다는 걸 다시 느꼈다. 그런 점에서 좋은 사람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다시 한 번 되새겨볼 만하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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