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이었던가, 발레리나 강수진 씨의 발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꼭 그렇게만 부를 수는 없는 안타깝고 슬픈 느낌이 들었다. 사람의 발이라고 하기가 어려운, 마치 나무뿌리와도 같은 발을 보면서 정상에 오르기 위한 치열한 삶에 무섭기도 하고 동시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들이 몸에 대해서 갖는 애착을 생각할 때 더욱 그랬다. 발이 저렇게 망가지도록 연습을 하면서 흘린 땀과 눈물은 얼마나 될까? 요가 고행자가 저보다 더할까? 시간이 흐를수록 발은 점점 성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애처로운 마음은 여전했다.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를 볼 때도 마음이 아팠다. 연습을 하느라 얼마나 매트에 얼굴을 부딪쳤는지 선수의 귀는 기형으로 변해있다. 그러나 그것은 감동이기도 하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집념과 노력이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흉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 주위에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발레리나의 발이 있을 것이다. 만약 저것이 강수진 씨의 발이 아니고 어느 무명 예술가의 발이라면 우리의 느낌은 달라질지 모른다. 또는 부모가 자식을 발레리나로 키우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시킨 탓에 발이 저렇게 변형되었다면 자녀를 학대했다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강수진 씨의 발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에는 성공한 사람에 대한 너그러움이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강수진 씨의 발을 바라보는 감정은 아직도 복합적이며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정상 도전에 대한 집념을 찬탄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렇게까지’라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인간의 위대함에 고개가 숙여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독하다고 고개가 저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성공의 화려함 뒤에 존재하는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저 발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사물의 이면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발레리나의 우아한 몸동작을 받쳐주는 것은 바로 저런 발인 것이다.
그런데 막상 본인은 자신의 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너무 못 생겼다. 그 외에는 별로 생각이 없다.” 한 분야에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걸고 매진한 사람에게서는 생에 대한 달관의 경지가 느껴진다. 그녀는 발레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완성시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비록 이름도 나지 않는 작은 일일지 몰라도 정성을 다하며 살아가는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삶을 성취하는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상처와 아픔은 우리가 보듬으며 안고가야 할 동반자이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역시 어딘가에 고통의 흔적들을 숨기고 있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