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 배역을 맡기려고 했더니 서로 흥부역을 맡으려고 하지 않아요. 이유를 물었더니 바보 같아서 싫다는 거예요.”
초등학교에 영어를 가르치러 온 외국인 원어민교사가 한 말이다. 역할놀이를 통해 영어를 가르치려 했는데 엉뚱한 데서 한국인의 의식의 한 단면을 보게 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무리 도덕적 가치 기준이 매몰되고 배금주의가 팽배해 있다고 해도 어린이들의 의식에까지 이런 풍조가 물들어있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더구나 교사들 교재에는 그 단원의 결론이 ‘놀부를 닮자!’로 나와 있다고 한다. 나로서도 잘 믿겨지지 않는 얘기다.
자본주의의 원조인 나라 사람이 의아하게 여길 정도로 지금 우리의 의식은 너무나 물질만능주의에 젖어있다. 도덕과 정신적 가치를 무엇보다 높게 여겼던 선조들을 두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사실 이런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난 것은 채 40 년도 되지 않는다. 아마 1960년대부터 진행된 산업화 과정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일어난 변화라고 본다. 그때에 등장한 온 국민의 슬로건이 ‘잘 살아보자!’였다. ‘잘 산다’는 의미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닐진대, 우리는 단순히 물질적 풍요에 매달려왔고 그런 의식은 점점 심화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먹고사는 걱정이 없는 계층의 사람들조차 잘 산다는 것이 이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살아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바뀌었다.
어떤 방법을 쓰든 돈만 많이 벌면 최고라는 의식은 흥부를 게으름뱅이라고 비판하게 된다. 돈이 된다면 제비 다리라도 부러뜨려야 한다. 그런 의식이 대운하 구상과 관계없다고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과정이 어떠하든 지금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장땡이다. 내적 가치보다는 도전과 열정이 찬양을 받는다. 어른들의 그런 의식은 자연스레 아이들에게 전염이 되고, 도리어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경제관념을 길러주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그렇게 모두가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피땀을 흘려야 하는 사회 구조에 너나없이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회의 구성원들이 과연 행복할까? 돈만 많이 벌면 행복하게 될까? 가난한 이웃이 주위에 있는데 나 홀로 부자로 사는 것이 진정 내적 만족과 행복을 보장해 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단지 무시할 뿐이다. 물론 흥부는 무조건 선인으로, 놀부는 무조건 악인으로 단죄할 수는 없다. 다만 흥부와 놀부로 표상되는 가치 중에서 우리는 너무 놀부적 가치관에 충실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자는 것이다. 놀부의 교활함이나 악덕조차도 자본주의적 시각에서는 당연하며 또한 영리하고 합리적이라고까지 한다. 오직 약육강식의 논리라면 맞는 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은 아니다.
흥부는 제 처자식조차 건사하지 못하는 경제적 무능력자로 폄하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바보’라는 아이의 말이 옳을지 모른다. 그러나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소박한 심성을 흥부에게서 발견할 수도 있다. 가난하지만 욕심 없이 사는 순수한 인간성, 그런 정신적 가치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쉽다. 세상이 그렇게 변해가고 있지만 만약 놀부들로만 득실대는 세상이라면 너무나 끔찍할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은 놀부를 닮고 싶어 하나요?”라고 묻는 외국인에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요!”라고 자신 있게 변명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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