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는 어떻게 한민족의 선택을 받았는가 >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가톨릭만이 아니다. 개신교는 우리 민족의 선각자들에 의해 선택된 종교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개신교)의 역사를 아펜젤러나 언더우드와 같은 선교사들이 들어온 시점을 기준으로 볼 수는 없다. 기독교 경전인 성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유통되고, 읽혀왔다.
이 땅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신라 시대 때 당나라에 온 경교가 유입됐다는 설까지 올라간다. 또 임진왜란 때는 가톨릭부대였던 소서행장 부대에 의해 가톨릭과 접촉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가톨릭이 전래된 시점은 1784년이다. 1783년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이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가게 되었을 때 이승훈으로 하여금 동행하게 했다. 그 때 이승훈은 당시 천주교 연구의 지도자격인 이벽으로부터 베이징의 신부를 만나 가톨릭의 내용을 배워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미 천주교 교리를 유교적 용어를 빌러 쓴 천주실의가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의해 1614년에 전래되었고, 천주실의도 1631년 유입돼 실학자들이 천주교를 접하고 있었다. 이승훈은 베이징의 성당에 찾아가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베드로란 영세명을 받은 뒤 1784년 귀국했다. 한국의 가톨릭은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기 실학자들의 스스로 선택에 의해 이 땅에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세계 종교사에서도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가톨릭도 이 점에 있어서 큰 자부심을 내보이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야말로 구한말과 일제 민족지도자들의 결단에 의해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는 ‘정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안창호, 조만식, 이상재, 이승훈, 유영모, 함석헌, 김약연, 이동휘, 이승만, 서재필, 김구, 유일한 등 먼저 깨어난 선각자들이 왜 개신교를 이 민족을 살릴 대안으로 선택한 것일까. 지금까지 개신교의 전래의 원인은 대부분 선교사의 노력과 성령의 역사로 풀이해왔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온 곳은 한국만이 아니다. 왜 일찍 선교사들이 갔던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것도 동양의 어느 나라보다도 유·불·선의 기존 종교 사상이 확고히 뿌리를 내린 조선에서 유일하게 개신교가 착근에 성공한 것일까. 처음 개신교를 받아들였던 선각자들은 대부분 유학자들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와 서당 훈장 앞에서 무릎 꿇고 사서삼경을 외우고, 상투를 틀고 산 그들에게 서양 선교사를 앞세운 예수쟁이들이 곱게 보일 리는 없었을 것이다. 초기 가톨릭 신자들이 전통적인 제사의식을 거부한데 대해 분노했던 박해자들의 의식 구조와 이들이 다를 게 뭐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이들은 결국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한 사회의 변혁을 고찰할 때 다차원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근대 종교의 변혁 또한 기독교만의 연구로는 그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 이 땅에 기독교가 착근한 성공 요인을 타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에서 찾는다면, 왜 다른 동양 국가들과 중동의 이슬람권에는 기독교가 비교 우위성을 보이지 못했는지를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착근하지 못한 이유가 일본이나 이슬람권의 지독한 박해 때문이라는 논리는 엄청난 박해를 뚫고 선교한 초기 기독교의 역사 앞에선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전체를 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은 전체를 볼 수 있지만, 흐린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본 것을 전체라고 우긴다. 우물 속의 개구리가 우물 안을 세계로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구한말 선각자들이 개신교를 ‘선택’한 원인은 기독교 자체에서보다는 그 시대와 사회, 기존 종교의 실상에서 찾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외세에 나라를 잃지 않고, 전쟁의 참화에 빠지지 않은 채 안정돼 있었고, 기존 종교들이 제 구실을 했다면 개신교가 초스피드로 착근에 성공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선각자들은 나라가 망해 내 가족과 내 동포들이 하나같이 지옥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빠져들고 있는 상태에서 국민 의식을 바로 세워줄 새로운 정신 사상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래돼 놋그릇처럼 녹슬어버려 공자의 인륜과 붓다의 만인 평등과 같은 초심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타성에 젖어버린 기존 종교 사상으로는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초기 개신교는 약자들에게 개벽사상이었다 >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불교는 고려시대 귀족불교와 왕족불교로 변해 조선의 등장과 함께 여지없이 심판을 받은 것처럼 조선 시대 500년간 국가 이념이었던 유교가 왕족과 양반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해 백성과 여성 등 약자를 핍박하는 수단이 된 데 대한 비판 의식이 싹틀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나라가 망해가며 백성이 도탄에 빠져있는데도 민중을 수탈하는 유학자들의 모습에서 ‘윤리 종교’라는 유교의 진면목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초기 기독교의 전래 상황에서 기존 기득권과 종교에 대한 반발로 인한 두 가지 특성을 주목한다. 하나는 기득권으로부터 소외된 대표지역인 평안도와 함경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개신교가 널리 퍼졌다. 소외된 지역민과 상민·중인, 여성 등 약자에게 기독교는 개벽이었다. 이미 지배 이데올로기로 굳어져버린 유교적 가르침은 삼종지도와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등을 강요하면서 약자들을 억압하는 수단이었다. 아무데도 하소연할 데 없이 가슴앓이로 죽어가며, 가깝게는 양반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널리는 관아에 시달림을 당하던 약자들에게 발 뻗고 울 수 있고, 하소연할 수 있는 교회의 모습 자체가 그야말로 말로만 들어오던 ‘개벽’이었던 것이다. 또 불교보다는 기독교와 상당히 가까운 교리적 틀을 갖춘 동학이 사회변혁운동이 이미 한차례 전국을 휩쓴 것도 기독교적 토양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각자들은 민족의 살길을 기독교에서 찾았다 >
민초들에게 부정의한 기존 종교와는 달리 평등한 모습으로 다가왔던 기독교가 약자의 호응을 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민족을 살릴 선각자들이 개신교를 민족 벽혁의 기재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민족혼을 살리기 위해 선각자들에 의해 만든 이 땅의 초기 기독교공동체로 평북 정주 용동촌과 간도 명동촌을 꼽을 수 있다. 용동촌은 ‘겨레의 스승’으로 불리는 남강 이승훈(1864~1930)이 1899년 친인척들을 집단 이주시켜 세운 이상촌이다. 남강은 이미 조선 제일의 거부가 되었지만, 그 때까지만도 개신교인이 아니었고, 유가적 이상촌 건립을 꿈꾸었다. 그런 그를 깨운 것은 기독교인 도산 안창호와 다석 유영모였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1905년)이 맺어져 나라를 잃을 위기에서 크게 당황하던 남강은 1907년 평양에서 도산의 연설을 듣게 된다. 도산은 “사람은 제가 자기를 업수이 여긴 후에야 다른 사람이 업수이 여긴다”고 했다. 나라를 잃고 이런 고난을 받는 근본 원인이 일제나 외부에 있기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간디가 영국 제국이 우리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 우리를 멸망시키고 있으므로 우리 스스로 깨어나서 화합하지 않고선 독립을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호소하기 10년도 더 전에 안창호는 이런 호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 남강은 용동촌에 오산학교를 설립해 ‘민족 깨우기’를 시작한다. 그에게 기독교를 가르쳐준 사람은 다석 유영모다. 다석 유영모는 이미 유학에 문리가 트인 사람이었다. 사서삼경은 물론 노자·장자까지 섭렵한 그는 오산학교에서 기독교를 가르쳤고, 남강은 민족을 깨우는 종교로서 기독교를 선택한다. 이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활약한 고당 조만식과 단재 신채호, 춘원 이광수를 비롯 함석헌,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소설사 염상섭, 벽초 홍명희, 시인 김소월, 화가 이중섭 등 수많은 인재와 우국지사를 낳았다.
간도의 명동촌은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규암 김약연(1868~1942) 선생이 1899년 함북 회령에서 141명을 이끌고 이주해 한민족공동체로 설립한 마을이다. 김약연은 본래 우리 조상인 고구려인들의 땅이므로 개간해 우리나라 땅을 만들어보자는 웅지를 품고 땅 수백정보를 중국인으로부터 사들여 한인 집단거주지를 조성했다. 그야말로 한국판 모세였다. 그는 1901년 곧바로 규암재라는 서당부터 지어 교육을 시작했다. 규암재가 서전서숙으로 발전하고 서전서숙이 1909년 명동학교가 되었다. 명동학교에서 문익환, 윤동주, 나운규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와 우국지사들이 자랐고, 일제의 탄압으로 명동학교가 문을 닫고 1930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합쳐진 뒤에도 기독교장로회의 설립자인 김재준 목사가 가르치고, 안병무, 강원용, 문동환같은 인재들이 나왔다.
규암이 개신교인이 된 것은 명동학교에 초대된 교사 정재면의 권유가 시발이 되었다. 이미 함경도 일대에서 대표적인 유학자로 손꼽힐만큼 탁월했던 유학의 대가가 개신교를 받아들인 것은 정신을 새롭게 개혁하고, 개신교 선교사와 목사들을 통해 쉽게 들여올 수 있는 신문물, 신교육이 아니고선 힘을 기르기 어렵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호남의 대표적인 교회인 전주 서문교회를 반석에 올린 경재 김인전 목사도 충남 서천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일찍이 사서삼경을 깊게 공부해 한학에 조예가 깊은 유림이었다. 그 때만해도 보수적인 전주의 양반들은 기독교인들을 쌍놈이라며 멸시했는데, 향교에 있던 어느 유학자보다 박학다식했던 김인전 목사의 학문적 깊이와 인격에 매료돼 기독교를 함부로 폄하하지 않는 풍토가 되었다. 김인전 목사는 3·1운동 뒤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의 의정원장으로 활약하다 서거한 독립지도자였다.
<개신교는 민족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민족과 하나가 되었다 >
선각자들은 나라 잃고 떠돌던 유대인들이 신앙심으로 뭉쳐 애굽을 탈출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 가는 구약에 크게 고무되었다. 유대인들의 고난과 우리 민족의 고난은 너무나 유사했기에 이들의 신앙이 우리 민족이 이 고통의 시련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남강과 규암, 경재 등 초기 선각자들은 모두 3·1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개신교인이었다. 그때도 역시 미국 등 제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독립운동을 돕기는커녕 애써 ‘개인 구원’만을 강조함으로써 사회 참여를 저지했다. 부흥사 등 상당수의 목회자들도 이에 동조했다. 당시 3·1운동을 앞두고 평양에서 개신교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도, 길선주·손정도·신흥식 목사 등은 신중론을 폈다. 그 때 남강이 일갈했다.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 자식과 형제자매와 이웃과 동포들이 전부 지금 지옥에 있는데, 혼자 천당에 갈 생각을 해!”
그런 남강의 일갈이 없었다면 평양대부흥의 기세도 사그라들어 여전히 서양의 이방 종교에 불과했던 개신교가 한민족과 일심동체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유일무이하게 착근에 성공하는 것을 불가능했을 것이다. 3·1운동 당시에도 개신교인의 숫자는 20만 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전체 인구의 1%도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개신교가 3·1운동을 주도해 이 땅의 고난과 함께 하면서 함께 만세를 부르짖음으로써 소수 외래종교에서 단시일내에 우리 민족의 종교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함께 생사를 걸었던 사람들, 더구나 죽음을 불사르고 앞장섰던 사람들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박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왜 가톨릭보다는 개신교가 역사의 헤게모니를 쥐었나 >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200년도 더 전에 들어왔다. 초기 조상 숭배를 중시하는 유교사회에서 제사를 거부하는 가톨릭은 엄청난 박해를 받아 무려 1만여 명이 순교했다. 이런 순교 영성은 세계 종교사에서도 드문 일로 신앙적으로는 고귀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나 가톨릭은 민족공동체적으로 일체감을 조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가톨릭인 민족공동체와 갈등을 낳은 그 대표적인 것인 ‘황사영 백서’ 파동이다. 정약용의 조카사위인 황사영은 조선의 가톨릭 박해상과 그 해결 방안을 적은 종이를 1801년 중국으로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서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려 했다. 백서엔 1785년 이후 한국 가톨릭교회의 사정과 박해와 순교 상황 등을 적고, 조선 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는 방안을 적었다. 황사영은 구베아 주교가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해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 이후 조선이 외세에 의해 망해가며 백성들은 도탄의 위기에 있었지만, 프랑스 등에서 온 선교사들은 오직 선교가 목표일 뿐, 이 땅 민초들의 삶과 국권 회복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의 예에서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제의 영웅이었고, 조선과 중국, 동아시아의 민족들에겐 철천지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을 계획한 안중근은 거사 준비 때부터 간도 용정의 천주교회를 찾아가 가톨릭 신부에게 협조를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를 도와준 것은 개신교인 규암 김약연이었다. 안중근은 규암의 협조로 간도 명동촌 뒷산에서 권총 연습을 했고,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그런데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해 한국 가톨릭교단은 안 의사를 살인범이라는 이유로 신자 자격을 박탈해 파문에 가까운 조치를 취했다. 한국 가톨릭을 대표했던 뮈텔 주교는 안 의사의 사형을 집행한 일본인들이 안 의사의 시체를 가족들에게조차 넘겨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그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논평했다. 안 의사가 순교 직전, 자신이 18살 때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빌렘신부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받고자 할 때도 뮈텔은 이를 거부했다. 대신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이를 행한 빌렘 신부에게 명령불복종을 이유로 2개월 간 미사 집전을 금하는 성무집행 금지 조처를 내렸다. 당시 상황을 볼 때 신앙이 중요한가, 조국이 중요한가라는 게 논점은 아니다. 당시 뮈텔 주교는 당시 가톨릭 신앙인이면서 동시에 나라 잃은 백성이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일제에 의해 죽임과 핍박을 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동정과 연민 없이 오히려 일제의 입장에서 도그마적인 신앙 교리만을 강조했던 것이다.
가톨릭 선교사들의 그런 분위기에 따라 전세계를 놀라게 한 비폭력평화시위였던 3·1의거를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에 가톨릭에선 단 한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가톨릭은 제사의식을 수용해 문화적으로는 일체감 조성에 노력했으나 이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은 대표 종교로 남았다. 암울한 일제 36년 동안 이에 항거했던 대종교와 보천교, 백백교 등이 사이비 종교로 몰리면서 초토화되고, 민족종교인 천도교와 증산교 등도 와해 직전에 간 것과 달리 가톨릭은 별다는 피해 없이 교단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민족과 일체감을 조성하긴 어려웠던 것이다.
<남북 분단 이후 박해받은 개신교인들은 개인적 원한을 신앙으로 극복하지 못했다 >
남북분단이후 남한 사회의 주도권은 미국이 잡았으므로, 남한에서 개신교가 누리는 특권은 막강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수인 가톨릭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전쟁 이후 국민 다수가 기아선상에 헤매고 있을 때 비교적 교회는 미국에서 오는 원자물자가 풍부했다. 또 이승만 정권은 목사 정치, 장로 정치를 한다고 할 정도로 개신교인들을 요직에 등용시켰다. 그것은 신식 교육을 받은 이들의 상당수가 개신교인인 때문이기도 했고, 미국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 미국 유학생 출신을 등용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빚어진 현상이기도 했다. 개신교는 미국, 남한 정권과 ‘함께’하면서 분단과 적대감을 부추기는 선봉에 섰다. 북쪽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공산당의 엄청난 탄압 끝에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가진 땅과 재산마저 모두 잃고 남하한 이들에게 어쩌면 이런 감정이 일어난 것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민족적 비극이 한민족 내부의 원인보다는 외세의 놀음에 이용된 측면에 대해 고찰하고, 과거보다는 미래의 조국과 평화를 위해 개인적 원한을 어떻게 극복해야하는지에 대한 종교인으로서 성찰은 지극히 부족했다. 남한에서 분단 이데올로기 조성엔 개신교가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그와 반대로 민주화에도 가장 큰 기여를 했다. 기독교 신앙이 가진 평등주의와 인권주의 등이 시민의식을 깨웠고, 많은 개신교인들이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희생을 감수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이미지는 현대에 뒤바뀌기 시작했다 >
그런데 개신교와 가톨릭의 이미지는 뒤바뀌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펼치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사제들의 촛불시위 등이 국민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독재정권에서 김수환 추기경 등 가톨릭 지도자들이 보인 균형 잡힌 제언 등이 국민들의 갈증을 해소해준 때문이었다. 개신교는 산업화와 성공주의가 지배하는 60~80년대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하면서 거대한 성장 흐름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로인해 교회는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 논리가 깊숙히 자리하게 돼 교회는 하나님이 아니라 맘몬이 지배하고 있다는 나오는 말이 나올 지경이 되었다.
<개신교는 왜 신뢰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하게 되었는가 >
지난해 실시한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지난 10년간 신자수가 가톨릭이 74.4%, 불교가 3.9%씩 증가한데 반해 개신교는 1.6%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데 대해 큰 충격을 겪었던 개신교가 이런 추이의 원인을 제대로 진단해보기 위한 세미나를 한 적이 있다. 목회사회학연구소와 일상과초월이 주최한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톨릭 성장’이란 제목의 세미나였다.
이 세미나에서 인천가톨릭대 명예교수인 오경환 신부는 사람들이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호감’을 들었다. 사람들은 일상생활 중에 관찰하면서 각 종교에 호감이나 반감을 갖게 되고, 아무리 열심히 선교해도 결국 호감을 갖는 사람만이 입교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가톨릭에 호감을 갖는 이유로 가톨릭 성직자들의 청렴성, 정의와 인권활동, 조상제사와 장례 예식에 대한 유연한 태도, 타종교에 대한 열린 태도 등을 들었다. 성당에선 신자들의 개인 헌금액은 절대로 공개하지 않아 헌금을 두고 경쟁을 시키거나 압박하지 않고, 성당의 수입 지출에 대해선 모두 공개하며, 신부와 수녀들은 생활비와 주거, 노후 생활, 질병 치료를 교구가 책임지기 때문에 주택을 소유하거나 재산을 모으지 않는 점을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는 이유로 꼽았다. 특히 1930~40년대까지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타종교에 대해 지극히 편협하고 독선적이며 배타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자세로 선교의 대상으로만 생각해왔던 가톨릭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거치며 ‘가톨릭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고, 갈라진 교회를 통해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으로 변했고, 한국 가톨릭에선 제사와 독특한 장례문화를 받아들여 유교문화에 젖어있는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가톨릭으로 입교하겠다고 결심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고 보았다.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이자 실천신학대학원 석좌교수인 박영신 교수는 “마침내 교회의 성장 드라이브에 모두가 지친 것 같다”며 교회의 성스러움을 회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지적했다. 그는 “바깥 사회의 성공 이야기를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는 교회에서 모든 것을 넘어서는 초월의 세계가 아쉽고 그리웠던 이들에게는 조용한 의례의 성스러움으로 모든 것을 초월하고자 하는 길 건너 저쪽의 신앙 공동체가 유일한 선택이었던 것”이라며 교인의 머리 숫자와 헌금 액수, 교회당 건물의 크기 같은 세속적인 관심과 집중에서 벗어난 성스러운 교회의 회복을 주장했다.
조성돈 목회사회학연구소 소장은 개신교가 교회와 목회자의 과잉 공급으로 목회자의 질이 보장되기 어렵고, 목회자들 사이에 경쟁을 불러오며, 전도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데 반해 가톨릭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쌓아 ‘브랜드화’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전도를 신앙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만들어내는 신학화의 문제를 개신교에 대한 반감의 주요 이유로 꼽았다.
<기독교는 기득권 종교로 변해가고 있다 >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모습은 어떨까. 이 나라에서 인권 탄압의 상징이던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사학의 비리를 줄이기 위한 사학법 개정 등에 반대하는 서울시청 앞 집회엔 늘 개신교 교회와 교인들이 ‘군중’으로 동원된다. 한국에서 기득권의 대변자를 개신교 스스로가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한국 개신교가 고려 말 불교나 조선 말 유교와 같은 기득권 종교로 이렇게 빨리 등장한 것은 ‘예수의 복음’이 아니라 ‘미국식 기독교’가 이 땅에 그대로 이식된 탓이 적지 않다. 미국식 성장주의, 패권주의, 승리주의 아래서 약자는 예수가 아흔 아홉을 뒤로하고라도 우선적으로 챙겼던 그런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배를 더욱 더 불리기 위한 먹잇감일 뿐이다. 물론 교회 안으로 들어가면 성경공부를 비롯한 많은 제자 훈련과 변화 프로그램들이 있고, 사랑과 봉사가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상당수 목회자들의 의식 구조를 지배하는 것은 성장과 전도, 확장과 건축 등이다.
올해 ‘평양 대부흥 100돌’을 맞아 어느 때보다 부흥이란 표어가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교회 전체적으로 보면 국민들이 개신교에 보이는 불신을 극복할 수 있도록 초심을 되새기고, 이기주의에서 초기의 민족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식의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이런 식의 ‘부흥 놀음’은 결국 전체 기독교인들을 늘리는 게 아니라, 소수의 대형교회들만 갈수록 신자가 늘어나고, 다수의 골목 교회들의 고사만을 부추기고 있어 교회 내적으로도 냉소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한국 교회에 만연한 물신주의와 이기주의, 기복주의, 성공제일주의가 산업화 시대엔 국민들과 함께하는 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이제 사람들을 질리게 하고, 교회에 대한 혐오증을 낳고 있다. 이런 것이 변하지 않는다면 전국민이 기독교화한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기독교로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물신주의와 함께 개신교가 외면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배타주의다 >
현대사에서 평화를 위한 가장 구체적인 노력을 보인 인물 중 한명으로 인도의 간디를 꼽을 수 있다. 인도는 우리나라처럼 다종교 국가다. 80%의 힌두교인과 11%의 무슬림, 그리고 가톨릭과 개신교, 시크, 자이나, 불교 등이 혼재해 있다. 간디는 힌두교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힌두교와 가장 적대적 관계인 무슬림에 의해 암살된 것이 아니라 같은 힌두교인에 의해 죽었다. 이교도는 적이고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배웠던 극우 힌두교인들은 다른 종교를 포용하는 간디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 조차 죽였다.
필자는 2003년 9월 <한겨레>에 1년 간 자비연수를 신청하고 인도로 떠났다. 간디아쉬람과 그의 제자인 바노바바베아쉬람에서 지내며 그의 비폭력 평화의 정신을 함께 호흡했다. 그리고 간디의 뜻을 가장 잘 실현하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방갈로르의 메논아쉬람에서 며칠을 보내며 메논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깊이 있는 얘기를 하면서, 평생 종교 간 화해와 비폭력을 위해 노력해온 그는 대화가 깊어가자 간디언들조차 무슬림에 대해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고 고백했다. 무슬림들의 목표는 전인도의 무슬림화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극우 개신교인들은 이런 무슬림들과 다를까. 전혀 다르지 않다. 상대를 인정치 않는데 그치지 않고, 그 막강한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폭력과 살상을 조장하고 있다. 이 세상에 무한 성장을 이루는 것은 암 밖에 없다. 다른 생명을 인정치 않고, 모두 자신과 같은 동질로 만드는 것이 바로 암이다.
한국 복음주의자들이 전도 만능의 환상을 전파하지만, 그런 환상을 깨고 있는 이들은 어쩌면 바로 자신들이다. 조금이라도 다른 것을 용납지 않는 편협함으로 인해 장로회 한 교단이 100개로 분파된 게 한국 개신교의 현실이다. 이런 편협함이 한국에서 개신교인과 비개신교인을 구분하고 있다. 이 땅에서 4분의 1인 개신교인이 섬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1990년부터 개신교 수가 정체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식 전도주의에 대해 비개신교인들이 식상하고 혐오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따라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며 자신들이야말로 한국 개신교 신화의 주인공이라는 복음주의야말로 이제 한국 개신교를 죽이는 장본인이 되어가고 있다. 더구나 개신교는 다른 종교에 대한 불관용과 배타주의 뿐 아니라 국가보안법과 사학법 등에 있어서 기득권 논리만을 내세움으로써 공동체적인 모습보다는 한 이해집단으로서 면모를 강하게 내보이고 있다.
<동양권에서 최초로 기독교가 안착한 한국에서 기독교의 사명은 >
인도가 다종교 사회라지만, 실은 세계에서 한국만 한 다종교 사회가 없다. 불교가 들어오면 불교가 꽃을 피우고, 유교가 들어오면 유교가 만개하고, 그리스도교가 들어오면 그리스도교가 정착하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다. 근현대 민족의 수난기에 왜소해진 천도교와 증산도 계통의 민족 종교와 원불교 등 자생 종교, 50여 개의 예배처를 갖춘 이슬람교까지. 우리나라야말로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종교 박물관이다. 유대인과 무슬림이 대치하는 팔레스타인,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대치하는 카슈미르 등 세계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전쟁의 절반 이상이 종교 때문이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 종교와 종교, 좌와 우가 만나는 한반도야말로 인류가 공존으로 가느냐, 파멸로 가느냐를 실험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아닌가.
한 나라에 하나의 종교만이 있는 나라에선 실상 태어나면서 종교가 정해져 다른 종교나 전통을 접할 기회도 없고 어울릴 기회도 많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전혀 다르다. 한 종교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기존의 문화와 언어, 종교와 핵융합을 일으키며 변화를 겪기 마련이다. 가령 필리핀처럼 기존의 종교 사상 문명이 확고하지 않은 나라의 경우엔 선진국의 종교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종교가 로마로 갔을 때 많은 변화를 겪었고,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다른 종교 문화가 만들어졌다. 불교의 경우도 불교가 태어난 인도에 못지않은 자체적인 문명을 지닌 중국으로 건너갔을 때는 다른 종교라고 할 만큼 다른 선(禪)으로 변화되었다.
우리나라는 기존의 종교 문명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화려하게 꽃핀 나라다. 이곳에 기독교가 들어온다면 마땅히 이 땅에서 회통할 수 있는 기독교 문명이 창출되어야 한다. 덴마크의 개신교 지도자이자 국민 영웅인 그룬트 비가 덴마크는 덴마크의 역사와 언어를 통해 부흥해야 한다고 했던 것에 주목했던 것을 제대로 새겨봐야 한다. 더구나 기독교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건너가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은 이후 핍박받는 식민지국 유대땅에서 태어나 기독교는 제국의 종교, 황제의 종교가 되었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세계 전파도 유럽과 미국 등 세계를 제패한 제국들의 힘에 의존했다. 지금 미국에 이어 세계 선교사 파견 2위국으로 떠오른 한국의 역사는 지금까지 선교 주도국들과는 전혀 다르다. 한국은 로마가 아니라 예루살렘이며, 팔레스타인이다.
<한국기독교는 초기 기독교의 순수성을 회복해야한다 >
우리나라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국가와 개인의 엄청난 시련 속에서 전존재를 걸고 고뇌했던 유학자들과 선각자들이었다. 그들은 식민지국 백성에게 희망을 주는 구약과 신약의 공동체성, 이웃 사랑 등을 받아들였고, 기존의 유·불·선의 인륜과 예의, 도덕을 합쳐 독특한 동양 기독교의 모습을 낳았다.
그러나 개신교가 급성장하고, 산업화의 변화를 겪으며 한국 기독교는 미국보다 더 미국식 기독교만이 자리 잡게 되었다. 한국이 미국이나 유럽의 제국들과는 달리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수없는 외침과 핍박을 받아온 역사적 위치에 있었음에도 세계에 나가있는 선교사들의 상당수가 오히려 미국인이나 유럽인들보다 더 제3세계 사람들을 멸시하고 공격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 강대국에 의해 수없이 짓밟히고 신음한 고난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야말로 서양과는 다른 방식으로 약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진정한 벗이자 봉사자로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닌가. 로마에서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잃어버린 약자와 함께하는 종교의 모습을 되찿아야 하는 것은 독특한 역사를 지닌 한국 기독교가 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가톨릭은 ‘약자에 대한 우선적 배려’를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는 반면, 개신교는 넘어진 자를 돌보기 전에 나라도 멀리 뛰자는 성장제일주의만이 팽배한 것이 현실이다.
한국 기독교가 신앙적으로는 물신주의에서 성공주의에서 벗어나 좀 더 사람들을 평안하고 화해하고 행복하게 하는 영성주의를 가꾸고, 한국 공동체에선 분단과 갈등 조장자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처럼 민족을 깨워 하나 되게 하려는 선각자와 예언자로 깨어나야 한다. 또 세계 유일의 다종교 사회에서 회통과 화해의 문명과 문화로서 종교 간 반목과 갈등에 신음하는 세계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전세계적으로는 세계를 종교 사상적으로 지배하려는 제국적 디아스포라가 아니라 모두를 사랑으로 포용하고, 약자를 포옹해주는 예수의 사랑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성소로 거듭나야 한다.
- 조연현 기자 /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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