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위대한 이기성

샌. 2007. 4. 12. 11:12

옛날에 한 청년이 살았다.

청년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여인은 청년에게 별을 따다 달라고 말했다.

청년은 별을 따다 주었다.

여인은 청년에게 달을 따다 달라고 말했다.

청년은 달을 따다 주었다.


이제 청년이 더 이상 그녀에게 줄 것이 없게 되었을 때,

여인이 말했다.

“네 부모님의 심장을 꺼내와!”


많은 고민과 갈등을 했지만,

결국 청년은 부모님의 가슴속에서 심장을 꺼냈다.


청년은 부모님의 심장을 들고 뛰기 시작했다.

오직 그녀와 함께 할 자신의 행복을 생각하며,

달리고 또 달렸다.


청년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청년의 손에서 심장이 빠져 나갔다.

언덕을 굴러 내려간 심장을 다시 주워 왔을 때,

흙투성이가 된 심장이 말했다.


“얘야, 많이 다치지 않았니?”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감동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내재된 어떤 숙명 같은 것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힘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에 숨이 막힐 정도였다. 물론 이 이야기에서 받는 느낌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희생적인 사랑에 감격할 수도 있다. 또는 하나를 주면 둘을 요구하는 여자의 속성을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에서 유전자로 프로그래밍 된 어찌할 수 없는 생명체의 숙명이 떠올랐다. 도킨스는 이런 유전자의 속성을 이기적이라고 불렀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 부모의 마음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대상이 피를 나눈 자식에게만 국한된 감정일 뿐이기 때문에 숭고하다고까지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한국의 어머니들에게서 보이는 자식 교육에 대한 열정도 좋게 보면 자식에 대한 사랑이고 교육열(敎育熱)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가족 이기주의로 볼 수도 있고 도를 넘어선 교육광(敎育狂)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기 자식의 성공과 영달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마음 또한 사랑이지만 인류애라 부를 수 있는 보편적 사랑의 범주에 넣기에는 뭔가가 부족하다. 그것은 자기애(自己愛)를 넘어서지 못하는 지나치면 위험하기까지 한 경계의 대상이기도 하다.


세상살이가 힘들어 질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부모로서의 보호본능이 발동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물체에 지워진 어쩔 수 없는 업보다. 그러니 누구를 비난하고 말고 할 성질도 못된다. 다만 생물적인 본능이 이끄는 대로 행동할 때 세상은 더욱 살벌한 정글로 변해간다는 사실이다. 세상살이는 어렵고 그래서 우선 나와 내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다보니 전체를 보는 시야가 좁아지고 사람들은 지엽적인 것에 집착하게 된다. 그 결과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 충돌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런 갈등이 폭발하면 다시 새로운 세상이 나타날지 모르지만 성숙된 사회는 미리 조화와 균형을 찾는 노력을 할 것이다.


위의 이야기에서 보이는 어떤 맹목성과 집착이 나를 두렵게 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이성이나 멋들어진 이념, 철학도 인간에 내재된 본성을 이길 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상이 냉혹한 현실 앞에서 무릎 꿇는 것을 그동안 무수히 보아왔다. 그러나 뭐라 해도 세상을 이끄는 원동력은 인간의 따스한 심장에서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심장이 한 위대한 말이다. “얘야, 많이 다치지 않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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