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한 옛날에
타오를 깨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보일 듯 말 듯 신비로우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깊이는
자로 잴 수 없을 만큼 그윽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달라고요?
글쎄요,
언어로 표현하려면
비유를 들어 말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의
신중한 몸짓은
살금살금 살얼음 강을 건너는 아낙네 같으며,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은
난생 처음 산길을 지나는 나그네 같으며,
다소곳한 모양새는
남의 집을 처음 방문한 손님 같으며,
남과 노니는 모습은
얼음이 녹아 물 흐르듯 부드럽네요.
그 소박한 모습은
산에서 갓 빼어내 다듬지 않은 통나무 같으며
그 마음의 깊이는
탁 트인 계곡을 연상케 하네요.
고여 있어서
희끄무레한 탁류 같다가도
흘러 흘러 어느새
깨끗한 청정수 -
이것이 바로
타오를 깨친 사람이랍니다.
어슬렁어슬렁 거니는가 싶으면
어느새 저만치 앞서가 움직이며,
모든 것을 이루고 또 이룹니다.
억지로 하는 법 없는
그는
닳아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닳아 없어지지 않으니
옛사람이지만
언제나 새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있으면서
새로운 변화에 조용히 따를 따름입니다.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焉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容, 渙兮若氷之將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動之徐生.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노자는 왜 깨친 사람의 모습을 억지로라도 묘사해 보려고 했을까? 그것은 아마 사람들이 깨친 사람의 겉모습에 관심을 많이 가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노자의 설명에도 그 모습이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아마 저잣거리에서 만나더라도 보통 사람들과 구별해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에게는 탁[濁]과 청[淸], 정[靜]과 동[動]이 공존하고 있다. 청[淸]으로의 과정은 현재진행형이다. 청[淸]을 이룬 사람이라야 깨친 사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