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원판 불변의 법칙

샌. 2004. 2. 25. 14:09
첫 직장에서 같이 근무했던 분을 25년 만에 처음 만났다.
이런 만남에서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이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는 건 별로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물론 그간의 세월 흔적은 얼굴과 몸에 눈에 띄게 드러나 있었다.
머리는 이미 반백이 넘어섰고 이마와 목에는 겹쳐진 주름살이 그 동안에 흘러간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말투나 웃는 모습, 또 그 뒤에 숨어있는 그 분의 성품이나 분위기는 25년 전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똑 같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 대화를 계속하다보면 다음 말이 어떻게 나올지도 정확하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 분이 세상을 보는 눈이나 가치관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가끔씩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옛 학교 동창들에서도 늘 똑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놀라게 된다.
사람의 외피는 세월과 함께 끊임없이 변해간다. 결혼하고,부모가 되고, 직업과 직위도 바뀌고, 성공과 실패도 겪으면서 여러 가지변하는 환경에 따라 사람도 거기에 적응하면서 변해가는 것은 사실이다.
겉으로 보이는 성격이 변하기도 한다. 출세했다고 거만해진 친구도 있고, 얌전했던 친구가 어쩜 저럴 수가 있나 싶게 달라져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겉 모습 뒤에 숨어있는 친구의 진짜 속내는 결코 달라지지 않았음을 발견하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는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마저 대동소이한 경우가 열에 아홉이다.
어쩌면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타고난 본성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의아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에게 있어 스스로의 내적인 성숙이나 나은 단계로의 변화는 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또 거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는데 우리 인간에게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지 않나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각자 틀 지어진 개인의근본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이타고난 것이든, 아니면 인생의 어느 시기에 형성된 것이든 한 번 틀 지어진 성격이나 품성, 가치관은 거의 고정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걸 누군가가 `원판 불변의 법칙`으로 재미있게 명명했다.

젊은 시기에 갖게 되는 환상 중에 하나는 나이가 든 먼 미래의 자신을 거의 완전한인격의 모습으로 상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 든다는 것을 대부분 인생의 원숙으로 오해한다.머리 희끗한 중년의 나이가 되면 흔들리지 않는 인생관을 갖춘 원만하고 성숙한 인간으로 되어 있으리라 또는 되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나이가 들어도 지금의 내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 경험으로 확신할 수 있다.
점잔을 빼고 큰 소리 떵떵 치는 사람들일 수록 그의 내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공허하기가 쉽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반대로 해석한다면더 정확히 그 사람의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틀을 깨뜨리기는 정말로 지난한 일이다.
그런 작업에 성공하는 사람이 희귀하게나마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진보란 일생의 노력으로도 몇 걸음밖에 전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사람의 어른이 되기, 그리고 한 인간으로 바로서기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내속에는 이미 현상이 끝난 원판 필름이 하나 있다.
거기에 다양한 빛이 비치면서 마음의 스크린에 온갖 영상이 펼쳐진다.
내게 주어진 필름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영상을 만들어 낼 것인가는 온전히 내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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