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고유한 색깔을 가진 글을 쓴다는 것은 칭송받을 만하다. 서너 문장만 읽어도 누구의 글인지 알 수 있다면, 그 작가는 자기 '류(類)'를 가진 것이다. 대표적인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에는 김훈이 있다.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 마취에 걸린 듯 몽환적인 기분이 든다. 몸이 땅에서 몇 cm쯤 떠오르는 것 같다. 센티멘탈하면서 비현실적인 세계로 인도한다. 독특하면 호오의 구별이 갈린다. 나는 하루키 스타일이 아니다. 몇 년 전에 <1Q84>도 힘들게 읽었다.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는 하루키의 에세이집이다. 글이 쓰인지는 30년도 더 되었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이 책은 삽화가 반은 차지해서 그나마 수월하게 넘어간다. 이 책에는 '소확행'이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나온다. 요즈음 이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하루키에게서 유래된 단어다. 짧은 글이라 옮겨본다.
소확행(小確幸)
최근 바지를 미국식으로 '팬츠'라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안에 입는 팬티, 즉 종래의(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팬츠는 뭐라 불러야 좋을지 알쏭달쏭할 때가 있다. 영어로는 언더팬츠겠지만, 그런 명칭이 확실하게 장착되어 있지 않은 일본에서는 바깥 팬츠와 속 팬츠의 혼란 상황이 그 혼미함의 도를 점점 더해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언더팬츠'를 모으는 게 - 물론 남성용입니다 - 일종의 취미다. 가끔 백화점에 가서 '저절 살까, 이걸 살까'하고 혼자 망설이다 대여섯 장을 한꺼번에 사들인다. 덕분에 서랍장 안에는 상당한 양의 팬츠가 쌓여 있다.
서랍 안에 반듯하게 개켜 둘둘 만 깨끗한 팬츠가 잔뜩 쌓여 있다는 것은 인생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하나(줄여서 소확행小確幸)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건 어쩌면 나만의 특이한 사고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혼자 사는 독신자를 제외하고 자기 팬츠를 제 손으로 직접 사는 남자는, 적어도 내 주변에는 그리 흔치 않기 때문이다.
또 러닝셔츠도 상당히 좋아한다.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러닝셔츠를 새로 꺼내 머리부터 꿸 때의 기분 역시 소확행 중 하나다. 다만 러닝셔츠는 늘 같은 상표의 같은 물건을 한꺼번에 사니까, 팬츠와 달리 골라서 사는 즐거움은 없다.
그런데 남자의 경우 속옷이라는 장르는 기껏해야 이게 다다. 여성의 속옷이 커버하는 광대한 영역에 비하면, 마치 분양주택의 앞뜰처럼 좁고 간결하다. 오로지 팬츠와 러닝셔츠뿐이니 말이다.
때때로 속옷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남자로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감회에 젖는다. 만약 내가 지금의 성격 그대로 여자로 태어났다면, 두세 개 정도의 서랍에는 도저히 속옷을 다 넣을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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