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샌. 2018. 10. 10. 10:58

부잣집 딸로 태어나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화가가 되어 전시회를 열고, 외교관 남편을 만나 세계 일주를 다니며 호화롭게 살다가, 파리에서 만난 남자와 불륜에 빠져 이혼당하고 몰락한 여자, 겉으로 보는 나혜석의 삶이다.

 

나혜석의 삶은 세인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에서는 나혜석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다. 그녀는 3.1 독립운동 시위 관련자로 수감되기도 했고, 음양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조선 여성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야학을 설립했고, 가부장 문화에 도전한 용기 있는 여성이었다. 페미니즘 운동의 원조라 할 수 있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에는 소설을 비롯한 나혜석의 작품이 실려 있고, 간단한 해설이 붙어 있다. 나혜석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다.

 

"정조는 도덕도 볍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거와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志)로 할 일이요,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다." 지금 읽어도 파격적인데 100년 전에 나혜석은 이렇게 썼다. 만약 어느 여성이 이런 글을 써서 발표한다면 오늘날에도 비난을을 것이다. 하물며 1920년대는 오죽했겠는가. 보통 용기가 아닐 수 없다. 나혜석에게는 이런 솔직 당당함이 있었다.

 

그러니 '이혼 고백장' 같은 글도 공개적으로 발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혼을 둘러싸고 그녀를 비난하는 소문이 돌고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을 변호할 필요가 있었으리라. 그녀는 이혼의 경위를 밝히고 남편과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받아들일 시대가 아니었다. 비난은 더 높아졌고 부모 형제도 연을 끊는 결과가 되었다. 그녀 역시 그런 결과를 각오하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을 것이다.

 

나혜석은 시대의 편견에 온몸으로 부딪힌 용기 있는 신여성이었다. 남성 중심의 전근대적 사회와의 싸움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시대를 앞서갔고, 그녀의 말로는 비참했다. 만약 나혜석이 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재능을 꽃피울 수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인 윤심덕도 그런 점에서는 비슷하다. 사회나 시대 의식에서 나혜석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다.

 

나혜석을 통해 여성 지식인의 성취와 좌절을 본다. 우리는 그녀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기지만, 나혜석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녀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갔다. 나혜석에게 글쓰기는 취미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드러내며 세상과 싸우는 도구였다.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이라는 책 제목이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나를 잊지 않는 행복'에서는 이렇게 썼다. "사람은 자기 내심에 자기도 모르는 정말 자기가 있는 것이다. 그(보이지 않는 자기)를 찾아내는 것이 곧 자기를 잊지 않는 것이 된다. 요컨대 우리들의 현재 및 미래의 생활 목표의 신앙 및 행복은 오직 자기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수밖에 아무것도 우리의 맘을 기쁘게 해 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남겼다.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은 영원히 못 갈 것이오.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다행히 우리 조선 여자 중에 누구라도 가치 있는 욕을 먹는 자 있다 하면 우리는 안심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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