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불요가 비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 선생님을 부른즉, 선생님이 가고 싶어했다. 자로가 언짢게 여겨 말하기를 "그만 두셔야지요. 하필 공산 씨에게로 가실 게야 있습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나를 부르는 것이 어찌 공연한 일일까! 만일 나를 써 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한 번 동쪽 주나라처럼 만들어 볼까!"
公山弗擾 以費畔 召 子欲往 子路 不悅 曰 末之也已 何必公山氏之之也 子曰 夫召我者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 陽貨 4
자로의 반응으로 봐서 반란을 일으킨 공산불요는 평판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공자는 공산과 손을 잡고 싶어 했다. 공자는 그만큼 절박했는지 모른다. 정치를 할 수 있다면 주나라가 동쪽에 있던 시절을 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공자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알아봐주지 않았다. 얼마나 불러주는 데가 없었으면 그랬을까 싶어 애처로운 생각이 드는 일화다.
여기서는 또 하나, 공자의 유연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자로보다 더 융통성이 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는 명분이 좀 부족해도 협력할 수 있다는 자세다. 공자가 뜻하는 바는 이상적이지만, 구체적 삶의 실천에서는 상당히 현실적이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