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장자[153]

샌. 2011. 1. 30. 09:26

위생의 도란

능히 태일을 품고 잃지 않는 것이며,

능히 점을 치지 않고도 길흉을 아는 것이요,

능히 머무를 수 있고 능히 그칠 수 있으며,

능히 남들을 사면하고 자기에게서 구하며,

능히 융통 자재하고 바보처럼 진실하여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아이는 종일 울어도 목구멍이 쉬지 않는다.

화평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종일 주먹을 쥐고 있어도 손이 땅기지 않는다.

그 덕이 공손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종일 보아도 눈을 깜작이지 않는다.

외물에 편향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되 갈 곳을 모르고 머물되 처할 곳을 모르며

만물과 더불어 따라가며 그 물결에 함께하는 것이니

이것을 위생의 도라 한다.

 

衛生之經

能抱一乎 能勿失乎

能無卜筮而知吉凶乎

能止乎 能已乎

能舍諸人 而求諸己乎

能소然乎 能동然乎

能兒子乎

兒子終日호 而익不사

和之至也

終日握 而手不예

共其德也

終日視 而目不순

偏不在外也

行不知所之 居不知所爲

與物委蛇 而同其波

是衛生之經已

 

- 庚桑楚 3

 

"어린아이로 돌아가라!" 장자와 노자에 여러 차례 나오는 말이다. 위생의 도[衛生之道]를 설명하는 이 부분의 핵심도 역시 동심론이다. 도가에서 무지와 무욕을 강조하는 것도 결국은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어린아이란세상에 물들기 전의 타고난 그대로의 존재다.천심 그대로의 순진무구한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라야 사물을 색안경이 아닌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세상의 지식이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다. 어린아이가 되라는 것은 인간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감이다. 그것은 아상(我想)이 사라진 맑고 투명한 마음의 원형이다.

 

억지로 아름다운 소리를 내려고 하면 목이 쉰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 유위와 무위의 차이다. 수레에서 떨어져도 어린아이는 덜 다친다. 몸이 부드럽기도 하지만 어린아이에게는 삶과 죽음에 대한 구별이 없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지 않는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천진하게 노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도 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그 무엇을 상기시켜준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존경쟁의 기술을 배우고 세상이 주는 가치관과 규범, 윤리의식에 갇힌다. 생명의 본성 대신 세상의 틀에 맞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세상이 주는 색안경을 끼고 사물을 본다. 문명과 지배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장자는 기존의 지식과 고정관념을 허물지 않고는 온전한 삶을 누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 구원의 길이고 위생(衛生)의 길이다. 어린아이가 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예수의 말씀과 같다. 장자와 예수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의 핵심은 '어린아이'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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